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제(손오) (문단 편집) == 생애 == 어려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중대한 임무를 맡았지만 시세에 영합해 황제의 좌우를 보호하자 여론에서는 그를 비웃었다고 한다. 어려서 명석하고 이치가 있어, [[손휴]] 때 둔기교위가 됐다. 위가 촉을 정벌하자, 오나라 사람들이 장제에게 말하길 "사마씨가 국정을 다스린 이래로 큰 재난이 자주 이르러, 지력이 비록 넉넉해도 백성은 아직 복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다시 그들의 자력을 다하여 파촉을 원정하며, 병사는 힘들고 백성은 피곤하나 가엾게 여김을 모르니, 무엇을 할 겨를도 없이 패할 것인데 어찌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장제가 대답했다. "[[조조]]의 공이 중국을 뒤덮고 위엄이 사해를 뒤흔들었지만, 속임수를 숭상하고 계략에 의지하며 정벌이 그치지 않아, 백성들은 그의 위엄을 두려워하나 그의 덕은 품지 않았습니다. [[조비]], [[조예]] 부자가 참혹하고 지독한 짓을 계속하여, 안으로는 궁실을 일으켰고 해마다 안정을 얻지 못하여 인심을 잃었습니다. 반면 사마씨는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민심이 그들에게 돌아갔으며, 수춘 3반과 조모의 죽음으로도 사방에선 움직임이 없으며, 위세와 무력이 성하여 근원은 견고해졌고, 민심이 복종하여 간사한 꾀가 세워졌습니다. 지금 촉은 [[황호|환관]]이 국정을 독점하여 나라가 엉망이고, 무력을 남용하여 백성은 피곤하고 사졸은 지쳤으며, 밖의 이익을 다투며 수비를 정비하지 않았으니 사마씨가 이길 것입니다." 라고 했다. 이에 사람들은 그 말을 비웃었으나, 과연 그 말대로 되었다. 269년에 승상인 육개가 [[손호]]에게 추천했지만 이를 거부하면서 일가족 전체가 추방되었으며, 279년 8월에 승상이 된다.[* 육개와 장제 사이에 사서에 기록이 안 되어 있는 승상이 있는 듯하다. 천새 원년(276년)에 만든 <봉선국선비>에서 발견된 내용으로 손호 시대에 '승상 [[연(삼국지)|연]], 태위 구, 대사도 섭'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러나 성씨는 기록하지 않아서 성은 알 수 없다. 즉, □연.] 280년에 진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심영(손오)|심영]], [[손진]], [[제갈정]] 등과 같이 싸웠으며, 심영이 말하길 우저에서 진의 수군이 내려 올것이니 기다렸다가 [[왕준(삼국지)|왕준]]이 이끄는 수군을 격파하자고 얘기하자 장제가 오가 망할 상황이라는건 누구나 아는바이나, 촉에서 온 병사가 여기에 이르면 다시 정돈을 못할거 같으니 지금은 강을 건너 결전하고 싸워 사직과 함께 죽을 각오로 싸워서 이긴다면 사기가 떨어져 격파당할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이기고나서 승세를 타서 서쪽으로 진군하면 나머지 진나라군도 이길수 있다고 말하였다. 장제는 이렇게 장강을 건너면 오군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생각해 맞써 싸우기로 한다. 3월에 [[왕혼]]의 부장인 [[장교(삼국지)|장교]]를 궁지에 몰아 항복시켰으며, 제갈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였다. 마침내 강을 건너 싸워 견진들을 파괴했으나 진군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후퇴하는 틈을 타 진군이 역습하여 오군이 대패했다. 이렇게 [[주준(서진)|주준]]의 군사와 싸우던 중 역공을 당해 각지에서 무너지던 오군은 거짓항복했던 장교가 후방을 공격하여 완전히 붕괴에 빠졌다. 제갈정이 수백 명을 인솔하여 달아나면서 합류시키려고 했는데, 장제가 달아나려고 하지 않자 제갈정이 스스로 그를 끌면서 말하였다. >"존망에는 정해진 운수가 있는 법인데, 어찌 경 한 사람이 그걸 아는 바가 있겠으며, 무슨 까닭으로 스스로 죽으려고 하시오?" 장제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중사(仲思: 제갈정의 자)! 오늘이 내가 죽는 날이오! 또 내가 아동이었을 때 바로 경의 집안의 승상[* 호삼성의 의견에 따르면 아마도 이는 [[제갈량]]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 제갈씨 가문에서 승상 직위를 맡은 것은 기록 상 제갈량이 유일하므로 이 말은 제갈량을 지칭하는 것을 가능성이 높다. 여담으로 제갈량과 어떤 식으로든 간에 연관이 있다면 장제가 양양 출신인 점으로 보아 제갈량이 형주에서 머물던 시점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제갈량이 입촉한 것은 213년-214년 경이며 이는 오멸망전보다 66년-67년 이전이다. 즉, 이때 장제가 아동이였다면 오멸망전 때 나이는 거의 최소 70대가 된다. 다만 권중달 교수는 주석으로 일설에는 [[제갈근]]이라는 설도 있다고 주석을 달아두었다.]께서 알아주신 바 되었는데, 항상 마땅히 죽어야 할 곳을 찾지 못하여 이름나고 현명한 분이 알아 돌아보신 것에 누를 끼칠까 걱정하였소. 지금 사직을 위하여 몸을 바칠 수 있으니, 다시 어느 길이 있겠소?" > >-권중달 자치통감 9권 156쪽 제갈정이 두세 번 다시 그를 끌었으나, 움직이지 않고 마침내 눈물만 흘리면서 보냈는데, 제갈정이 100여 걸음을 가서 뒤를 돌아보니 이미 진의 병사들이 죽였다고 한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 전투인 판교 전투로 장제, 손진, 심영과 7800여명의 오나라 군사들이 전사했다고 하며 이후 장제는 목이 잘려 낙양에 보내졌다. 장제의 군사는 오나라 중앙의 정예였고 이 군대가 대패하면서 오나라인들이 크게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후 [[왕혼]]과 주준이 기세를 타고 건업으로 공격해 들어가 [[손호]]의 항복을 받아 오나라를 멸망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