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영실(장영실) (문단 편집) === 박연과의 만남과 화려한 귀환 === 몇 년이 지난 세종 9년, 남양에서 몸을 숨긴 채 명나라에서 장희제한테 준 휴대용 목제 관측기구를 계속 만들고, 편경을 만드는 모습[* 세종실록은 아니지만 중종실록을 보면 박연과 장영실이 함께 악기를 만들었다고 적혀있는데 그것을 활용한 모습이 아닌가 싶다. ]으로 재등장한다. 자신이 조선과 세종의 위협을 줄 것이란 장희제의 경고에 어릴 적 이름인 은복을 쓴 채로 남양에서 머물며, 주변 마을들을 떠돌면서 해시계를 만들어주고, 아이들에게 노래를 통하여 천문을 가르쳐주는 한편 틈틈이 편경을 만들고 있었다. 15화에서 밝혀진 바로는 이전에 세종이 역법을 만들고 나면 음계의 표준을 만들 것이라 말했던 것을 떠올리고 만든 것이라 한다. 그러던 중에 제대로 된 편경을 다시금 만들기 위해 직접 경석을 채굴하러 남양에 왔다가 뛰어난 장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박연과 만나게 되고, 영실의 실력을 알게 된 그로부터 자문을 받아서 완벽한 편경을 완성하게 된다. 이후 박연과 함께 편경을 한양으로 보내기 위해 수레에 싣던 도중, 자신이 만들어서 배포한 휴대용 관측기구로 추적해온 이천과 석구.[* 다만 석구와 같은 경우에는 봇짐장수로 활동하고 있는 자신의 제자인 오필교를 통하여 계속 소식을 확인하고 있었었던 듯 하다.]를 다시금 만나게 된다. 이후 이천과의 대화에서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천문관측소 방화 사건 당시 김학주 일당에 의해 죽어간 박효원, 임명덕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어, 자신이 직접 나서거나 이천이나 세종을 찾아가려 하였으나, 장희제의 경고 때문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리지도 못하며 여기저기를 방황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감나무 밑에서 누워있던 도중 떨어진 감을 맞고, 하늘을 쳐다보게 되는데, 그제서야 다시금 별을 보게 되었고, 죽은 이들도 그렇지만 이천이나 세종 등 아직 살아있는 다른 이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다시 마음을 다잡고 남양에 정착하여 일에 집중하여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고. 그리고 이제는 남을 미워할 시간 없이 일에 집중하고 싶다는 말을 하는 등, 조금 ~~주인과 닮은~~ 해탈한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이천, 석구만이 아니라 주태강 부녀와도 재회하게 되는데, 특히 주태강에게는 해시계 등 격물을 통하여 상업 등이 활성화되어 활기찬 형태가 된 남양의 모습, 즉 명나라 유학 시절 주태강으로부터 들었던 그의 꿈이 실현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를 기쁘게 하였고, 그로부터 한층 더 성장하였다는 평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다시 한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되고, 편경을 만든 공으로써 조정에 다시금 복귀하게 되며, 세종과 소현옹주와도 재회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후 수일 간 이어진 폭우와 기존에 있던 물시계의 고장으로 시간을 알 수 없게 되면서 민심이 혼란스러워지자, 그로 인해 이루어진 대책회의에서 장희제가 명나라에서 본 수운의상대를 참고하여 만든 해동금루를 궁에 설치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려고 할 즈음, 수운의상대 형식의 물시계인 해동금루는 조선의 시계로는 맞지 않으며 새로운 방식의 시계가 필요하는 말을 하며 반대의 뜻을 내비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