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수왕/생애 (문단 편집) ==== 신라 침공과 [[포항시|미질부]] 전투(481년) ==== 이 시기 신라는 언제 고구려군이 [[수도(행정구역)|수도]]를 기습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위의 웅진-대전 전투 중에는 [[자비 마립간]](제20대)이 [[명활산성]]에 임시로 들어가 항전을 대비도 하였고 꾸준히 축성을 하는 등 고구려 침공에 대비했다. 당시 신라의 [[소지 마립간]](제21대)도 바보가 아닌지라 481년 2월에 고구려와의 최전선인 비열성(현 [[함경남도]] [[안변군]] 일대)에 행차해 병사들을 위로하고 위로품을 나눠주며 전선 방비에 나섰을 정도였다. 문제는 상대가 당대 동아시아 최강의 위력을 자랑하던 고구려군이었다는 점이었다. 개로왕을 처단한 뒤 숨을 고른 장수왕은 481년 3월에는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진행한다. 1개월 전까지 신라 국왕이 직접 최전방 순시를 하며 방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군은 침공 직후 신라 북변 7개 성을 순식간에 점령하고, 미질부(彌秩夫: 현재의 [[포항시]])까지 진격에 성공한다. 지도상으로 보면 알겠지만 경주 바로 위가 [[포항시]]였기 때문에 신라 입장에서는 수도가 불타기 직전 상황까지 내몰린 것이었다. 이에 [[소지 마립간]]은 [[백제]]와 [[가야]]에 도움을 요청했고 백제와 가야가 호응, 신라-백제-가야 연합군이 고구려군과 맞서 싸워 미질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장수왕의 신라 침공은 무위로 돌아간다. >三月, 高句麗與靺鞨入北邊, 取狐鳴等七城, 又進軍於彌秩夫. 我軍與百濟·加耶援兵, 分道禦之, 賊敗退. 追擊破之泥河西, 斬首千餘級. >([[481년]]) 3월,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호명(狐鳴)[* 정확한 위치는 불명이나 [[청송군]] 일대([[이병도]]), 또는 [[영덕군]]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또 [[포항시|미질부(彌秩夫)]]에 진군하였다. 우리 병사가 백제,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서 그들을 막았다. 적이 패하여 물러가자 니하(尼河)[* 정확한 위치는 불명이나, 고구려의 신라 침공 때마다 언급되는 장소라는 점을 근거해 학계에서는 고구려와 신라의 최전선 부근이었던 [[강릉시]] 인근의 하천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한강]] 상류 인근, 강릉의 성남천(城南川), [[대관령]]이 발원지인 연곡천(連谷川), [[평창군]] 일대로 추정하기도 한다.]의 서쪽까지 추격하여 쳐부수고 1,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 >《[[삼국사기]]》 제3권 <신라본기> 제3 -[[소지 마립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642684&cid=49615&categoryId=49798|#]]-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