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비 (문단 편집) ==== [[장판 전투]]([[장판파]]) ==== [[유표]]가 죽고 조조가 형주로 들어오자 유비는 강남으로 달아났다. 조조가 하루 낮, 하루 밤을 추격하여 당양 장판에 이르렀다. 유비는 조조가 갑작스럽게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처자식을 버린 채 달아났고, 장비로 하여금 20기를 이끌고 뒤를 끊도록 했다. 장비는 물가에 의지한 채 다리를 끊고는 눈을 부릅뜨고 창을 비껴 잡으며 외쳤다. >내가 장익덕이다. 앞으로 나와 생사를 가름하자! 감히 접근하는 적군이 아무도 없었고 이 때문에 마침내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묘사는 상단의 기록이 전부이기 때문에 이 보다 더 자세한 정황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따라서 장비가 다리를 끊은 것이나 조조군을 대치한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오늘날 우리로서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진수는 장비의 용맹과 담력을 강조하기 위해 저 에피소드를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이다. 이미 적군이 한 번에 우르르 몰려 올 수 있는 상황에서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장비의 대담함과 용기를 증명한다. 예를 들자면 [[감녕]]의 무용을 자랑하는 일화로 1300명의 장사를 거느리고 5000명을 이끄는 [[관우]]의 도하를 막은 일이 있는데, 여기에서의 장비도 거의 비슷한 일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감녕이 1300명으로 5000명(물론 지휘관이 관우이기는 했으나)을 저지한 것에 비하면, 이쪽은 21이라는 정도. 이때 조조군의 정예 기병대 [[호표기]]가 5000 vs 21의 상황에서 장비를 두려워 해 공격하지 못했다는 것은 장비가 비범하게 활약하여 전국구급으로 명성을 날려왔기 때문일 터인데, 정사에서 특별히 전해지는 기록은 그가 [[관우]]와 함께 [[만인지적]]으로 불렸다는 기록 정도이다. 장비열전에는 '''강물에 의지해서''' 라는 말이 나오는데, 연의에서의 모습이 익숙한 사람들이 '강 반대편으로 건너가서 다리를 없애버린 후, 멀리서 소리치는 장면'쯤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절대 강을 건너가서 다리를 끊었다는 식으로는 해석될 수 없다. 의지한다는 것은 배수진을 의미하며 말 그대로 장비는 강물을 등진 상태로 놓고(의지하고) 다리를 끊은 것이다. 이 장면이 정사에 나오는 것부터가, 진수가 관장지용이라 불리는 장비의 용맹무쌍과 그 활약상을 기록하기 위함이다. 기록의 의도가 그럴진데 강 건너에서 못 넘어오게 만든 다음 소리만 바락바락 지르는 장면이라면 어색하기 짝이 없다. 강 건너편에서 그랬다면 강물을 의지했다는 표현이 아니라 강을 사이에 두었다고 기술해야 자연스럽다. 참고로 여기서의 장비는 조조의 정예기병 5천을 전부 맞닥뜨린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장판파는 매우 혼란스러운 땅이었고, 조조군의 5,000 정예기병과 유비의 패잔병, 그리고 그 난리통에 뒤섞인 수많은 민초들이 도망치고 있었다. 조조의 병사들은 유비를 찾거나, 아직 남은 유비군과 싸우거나, 민가를 약탈하거나 등등 제대로 통제되고 있지 않았다. 즉, 5,000명의 정예기병이 질서정연하게 유비를 쫓고 있던 것이 아니므로, 장비가 상대했던 것은 5,000 기병 전체가 아니다. 아마 유비 쪽으로 추격을 해오던 기병 수백과 맞닥뜨린 후 배수진을 친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혼자서 수백의 [[기병]]을 맞이하여 사생결단을 내자고 호통을 치는 것 (그것도 퇴로를 스스로 끊은 채) 또한 보통 간담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정사에 기록된 내용이라고 해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진짜인지 의심 안 하는 게 이상할 정도'''의 일이지만, 진수가 기록한 것은 '''그 정도로 놀라운 활약이기 때문'''이다. [[유비]]가 후미를 맡기기 위해 장비를 보낸 것은 어떤 의미에선 자살 특공 명령이나 다를 바 없었지만, 그것을 수행한 인물은 이 내용 없는 지시를 전술로 승화할 수 있는 능력과 개성을 가진 장수였다. 장비는 한 줌 밖에 안되는 휘하 기병들을 이끌고 장판교 다리 앞을 가로막았다. 기습으로 인해 군대가 붕괴하고 지휘관 유비의 도주로 한번 꺾였던 유비군의 기세가 장비에 의해 뻔뻔하게도 그런 적 없었다는 듯이, 오히려 장비의 [[사자후]]로 인해 그 정예인 호표기들도 겁을 먹어 감히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더 요란하게 우뚝 선 상황이 된 것이다. 조조는 오환족 같은 이민족 기병도 거느렸고 따라서 이민족 궁기병이 정예인 이들 사이에 섞여 있을 확률이 매우 높았는데도 호표기들은 멀리서 활 한번 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조조는 이 기습으로 철저하게 유비군을 격파한 후였고 유비의 목숨은 어떻게든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있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조조는 유비가 군비가 충실한 강릉으로 갈까봐 식량, 말 먹이를 보충해 줄 치중까지 버리고 급하게 양양으로 갔다가 유비가 지나갔다는 얘기를 듣고는 하루종일 잠도 안 자고 정예기병을 몰아서 단숨에 300여 리나 강행군으로 온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미 급습의 효과까지 끝난 난전상태에서 장비가 아직 현장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잔존 유비군이 모여 조조군의 발목을 잡고자 죽기 살기로 덤벼든다면[* 실제로 나중에 이 잔존 병력들은 특별한 지시도 없는 상황에서 유비가 있는 강하로 집결해 적벽대전에 참전할 정도로 강한 생존력과 충성심을 보인다.] 조조로서도 난감한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설령 이 잔존병력까지 격파한다고 해도, 말이고 사람이고 더욱 피로가 누적되고, 보급도 없고, 전투로 상하기까지 한 군대로 유비를 계속 추격하거나 강릉에 가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거기에 군대는 자신들에게 암묵적으로 적대감을 품고 있는 10만에 가까운 군중도 수습해야 했다. 추격대, 중군, 치중이 분리된 군대를 이끌고 추격만 계속하다간 아직 형식적인 항복만 받아 조조에게 적대적인 형주 인심이 돌아서면 위험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 조조군 역시 쉬어갈 필요가 있었기에 조조는 더 이상의 무리는 피하는 쪽을 선택하며 추격을 포기하고 확실하게 유비가 강릉을 장악하는 변수를 없애기 위해 그곳으로 향한다. 이후 장비는 유비와 제갈량, 조운 등과 수십 기로 달아나, 한진나루로 비스듬히 향하다, 마침 관우의 배와 만나, 면수를 건널 수 있었고, [[유표]]의 장자 강하태수 [[유기(삼국지)|유기]]의 무리 만 여명과 조우하여, 더불어 함께 하구에 이르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