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면/일생 (문단 편집) === [[장면 내각]] ===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제2공화국이 출범하자 대한민국 최초로 의원내각제를 시행하여 국무총리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장면이 국무총리로 취임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김두한]]이 장면의 친일 경력 및 [[창씨개명]] 사실을 전단으로 뿌리고 다니며 장면 깎아내리기에 앞장서기도 했다.] 1960년 [[5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국무총리가 된 후에는 민주당 신파의 [[리더]]로 활동하면서 당시 대통령 권한을 확대하려 했던 민주당 구파 [[윤보선]] 대통령과 껄끄러운 사이를 유지했다. 윤보선은 의원내각제 국가에서는 큰 권력을 갖지 못하는 대통령이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대통령의 권한을 확대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하는 바람에 장면과 충돌을 빚게 되었다. 내각의 리더인 장면이 민주당 신파의 리더이기도 해서 내각 장관들이 신파 일색일 수밖에 없었던 점에서 갈등은 클 수밖에 없었다. 국무총리 시절 장면은 [[이름]]처럼([[勉]] 근면할 면) 매우 근면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정무를 보기 시작했고 밤 늦게야 일을 끝마쳤다고 하는데 덕분에 아랫사람들은 죽어나갔다고 한다. 나중에 박정희 군사 정권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시리즈]]의 모태가 되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도 장면 내각에 의해 세워졌다.[* 일부에서는 "장면의 5개년 계획은 [[농업]] 위주의 정책이었고 [[박정희]]의 5개년 계획은 [[공업]]화 정책이었기 때문에, 장면은 박정희와 같은 성과를 못 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는데, 애초에 5개년 계획은 이후에도 정책이 계속 수정되고 보완되면서 이어진 것이기 때문에, 초기 정책만 보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당장 박정희 정권만 해도 집권 초기 [[화폐개혁]] 실패 등으로 미국의 대대적인 정책 수정 개입을 자초한 전력이 있다. 장면은 [[한국전쟁]]으로 황폐화된 [[산업]] 시설을 복구하기 위해 국토 개발 사업을 추진해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_%EA%B5%AD%ED%86%A0%EA%B1%B4%EC%84%A4%EB%B3%B8%EB%B6%80|국토건설본부]]를 구성하고 스스로 본부장에 취임했을만큼 농업 정책에만 몰두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장준하]]를 비롯한 당대의 [[전문가]] 여럿이 모여 경제 계획을 수립하고 초기 단계의 몇몇 작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1년을 못 채우고 쫓겨난 정권치고는 나름 의욕적으로 일한 셈이었다. 그러나 민주당 신구파 갈등이 너무 심하다보니 1960년 말에 민주당 구파가 대거 [[탈당]]을 하여 [[신민당(1960년)]]이라는 별개의 야당을 차리는 바람에 거대 [[여당]] 프리미엄은 누리지도 못했고 4.19 혁명 이후로 고삐가 풀린 [[언론]]에서도 갑자기 찾아온 [[자유]]를 주체를 못하며 장면을 까대는 [[사설]]을 내놓는 등 '장면 총리 흔들기'에 동참하다보니 장면 총리의 [[지지율]]이 내리막길을 걸으며 정책 추진력에 있어서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경제 정책의 성과가 나오기도 전에 국무총리직에서 강제로 내려오게 되는 계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을 진압하고 있다는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의 보고를 받고서는 정부 주요 인사들과 함께 국무총리 관저(반도[[호텔]])에서 2시간 가량 머물며 장도영의 사후 대처 보고를 기다렸다. 그러나 육군참모총장은 바로 앞에 있다고 연락해 놓고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를 않았고 국무총리 관저 인근에서 총격이 벌어지자 우선 피신하시라는 함께 있던 [[현석호]]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장관 등의 부탁에 국무총리 관저에 직통 연락망을 구축한 뒤[* 안타깝게도 장면이 떠난지 10여 분 후 박정희가 보낸 [[박종규]] 등 특수부대가 쳐들어와 이를 해체시켜버렸다.] 마지못해 차를 타고 새벽 4시 30분 국무총리 관저를 떠났다.[* 다급한 나머지 [[안경]]도 잃어버렸다. 후일 [[가르멜회|가르멜 봉쇄수녀원]]에서 나왔을 때 안경도 없이 [[연설]]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후 [[주한미국대사관]]에 신변 보호를 요청하였으나 들어가지 못하였고[* 장면 [[홈페이지]]에 있는 당시 의전비서 [[이홍렬]]의 1999년 증언에 따르면 장면의 차를 운전하던 운전수가 영어를 제대로 할 줄 몰라 대사관에 상황을 잘 전달하지 못하는 바람에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증언자인 이홍렬 본인도 직접 본 것은 아니라(자신이 운전수와 총리만 태워서 보냈다) 확실하지는 않아서 확인이 필요한 부분. 대사관 직원이 부재 중이라 혹은 신원 확인이 되지 못해서라는 설도 있다.] 이에 아내와 자녀들은 다른 곳으로 피신시킨 뒤 5월 17일 새벽 6시경에 홀로 [[가르멜회|가르멜 봉쇄수녀원]]에 피신해 외부 상황을 [[실시간]]으로 주시하며 외부와 연락을 주고 받았다. 16일에는 마셜 그린이 성명을 냈다는 사실을 입수하고서는 감사 [[전화]]를 보냈으며 자신은 안전하니 유엔군 [[사령관]]이 'take charge' 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17일에는 아침에 [[프랑스]] 대사로 추정되는 이가 장면의 [[편지]]를 직접 받아 [[주한미국대사관]]에 건네주었고 오후에는 장면과 경향신문 사장 [[한창우]]가 전화를 주고 받았다. 18일 오전에는 장면이 직접 총리고문 [[도널드 위태커]]와 비밀리에 접촉을 취했으며 결국 정오 무렵에는 육군참모총장을 만났다. 그러나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이미 육군참모총장을 설득해 5.16 진압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둔 상태였고 이에 미국은 장면과 연락을 주고 받았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핑계로 사태를 방관하게 된다. 초기 소위 소장파 장교들로 구성되어 있던 쿠데타 세력은 수천 명에 불과했으나[* 쿠데타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병력]]은 6군단 [[포병]]대와 [[대한민국 해병대|해병대]], 제1공수특전단 등 일부에 불과했고 특히 서울을 공격한 부대는 [[박정희]]를 주축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8기생 250명과 병력 3, 500명 뿐이었다.] 서울 중심으로 포섭하여 새벽에 국무총리 집무실, [[청와대]], 서울특별시장실, [[방송국]], [[대한민국 육군본부]] 등 주요 기관에 잠입하고 관련 주요 인물을 체포 또는 연금한 뒤 1군 등 자신들의 [[토벌]]을 위해 동원될 수 있는 일부 부대를 중간 장교들이 [[높으신 분들]]을 습격해서 체포하는 형식으로 장악한 정도였기 때문에 선전했다 한들 정부를 무너뜨리지 않아 기반이 불안정했다. 때문에 대통령인 윤보선을 확보했지만 실질적인 [[행정]]을 담당하고 있던 장면을 놓친 것은 쿠데타 세력으로서는 위험이었다. 이때 [[주한미군]] 사령관인 C.B 매그루더는 자신의 허락없이[* 이 시기 모든 [[작전]]통제권은 [[미군]]에게 있었다. 평시작전통제권이 한국에 넘어온 것은 1990년대로, [[전시작전통제권]]은 추후 넘어올 예정이다.] 함부로 군을 움직인 것은 물론이요 [[하극상]]의 극치인 쿠데타까지 일으킨 박정희와 일당들에 대해 격노했으며 요청만 들어오면 당장 [[전차]]를 몰고 가서 [[반란군]]들의 머리통을 다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물론 제도상으로는 유엔군 사령관에게 한국군의 동원권이 존재하였으나 미국은 권한의 직접적인 행사를 통한 정치적 개입을 꺼렸고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의 재가를 받는 형식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공식적인 재가 과정에서 차질을 빚자 유엔군 사령관이 'take charge(권한 행사)'를 해달라는 장면의 요구는 수용되기 어렵게 된다.[* 심지어 [[계엄령]] 선포까지 검토했다.] 그러나 매그루더의 설득에도 [[윤보선]]은 쿠데타 진압을 거절하였고, 매그루더가 진압 명령서를 들고 가서 "사인만 해주면 된다"고 했으나 "우리나라는 [[며느리]]가 물에 빠져도 [[시아버지]]가 안고 나오지 못한다."는 해괴한 발언을 하며 사인을 거부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올 것이 왔구나!"를 두고 그는 쿠데타를 잘 이용하면 장면 세력을 제거하고 자신이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아니냐는 추론도 있다. 그러나 윤보선 본인은 소식으로만 들은 '온다는 것이 왔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다고 반론하였다.[* 다만 실제 제2공화국은 의원내각제라서 실권은 국무총리인 장면에게 있었음에도 그 권한을 대통령 윤보선이 휘두르려고 해서 둘이 사이가 안좋기는 했다.] 그렇게 [[미국 정부]]까지 불간섭 원칙을 내세우자 5월 17일 [[미국 국무부]]는 "장면은 나타나지도 않았고 지도력을 행사하지도 않는다"며 공식적인 개입 거절을 발표하였다.[* 이후 [[존 F. 케네디]] 정권은 쿠데타 정권을 오히려 공식적으로 승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전달받은 장면은 5월 18일 오후 1시쯤[* 애초에 몰래 나온거라 정확한 시각이 알려져 있지는 않다. 약 1시지만 1시가 조금 안된 시각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도 12시 30분은 넘었기 때문에, 516 초기에 장면이 수녀원으로 숨었던 5월 16일 오전 4시 30분부터 이 시각까지를 근대사 연구쪽에서는 "장면의 54시간"이라고 부른다. ] [[가르멜회|가르멜 봉쇄수녀원]]을 나왔다. 그 사이 [[전두환]]이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이끌고 쿠데타 지지 [[시위]]를 하며 점차 반란군의 입지는 탄탄해져 갔고 결국 2일 뒤인 5월 18일 미국은 개입하지 않겠다는 연락을 받은 뒤 [[가르멜회|가르멜 봉쇄수녀원]]에서 나와 내각 총사퇴 [[서류]]에 서명하고 [[하야]]를 선언하며 쿠데타의 성공을 인정하고 말았다. 군의 정치 불개입을 주장하며 끝까지 반란군 세력에 동조하기를 거부했고 진압을 준비하다가 윤보선에 의해 부하들에게 지도부의 진압 중지 명령이 내려지자 이를 실행하지 못하고 체포당한 1군 사령관 [[이한림]][* 이로 인해 예편되었으나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 장관직을 지낸다.] 등 쿠데타를 막으려던 움직임은 이미 완전히 실패한 뒤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