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로회신학대학교 (문단 편집) === 해방 전 역사 === 초창기에는 각 장로회 선교부의 [[선교사]]들이 [[평양]]에 가서 가르쳤고, 학생들은 1달 공부하고 3달 목회하는 방법으로 1년에 3달 공부하여, 5년간 수업하는 제도로 운영되었다. 1907년 6월 [[길선주]], 한석진, 이기풍 등 7인의 첫 졸업생이 나오게 되었고 그해 9월에 독(립)노회가 창설되어, 이분들이 한국 장로교회의 첫 [[목사]]들로서 안수되었다. 1912년에는 장로회 총회가 창립되었으며, 이를 기념하여 [[중국]] [[산둥성]]에 김영훈, 사병순, 박태로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여 해외 선교의 시작이 이루어졌다. [[1919년]] 기미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본교 출신 목사들 여러분도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학교]] 학생들도 다수 이 운동의 선두에 나서 활동함으로써, 여러 학생들이 체포되어 학교가 일시 휴교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일제의 갖은 억압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의연히 그 임무를 수행해 왔으나, 1938년 제27차 총회에서 [[신사(신토)|신사]]참배안이 총회장에 의해 불법적으로 선포되므로, 신학교는 이에 동참할 수 없다고 거절함으로써, 무기휴교 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신학교가 문을 닫자, 목사 양성을 중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총회는 친일하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1940년 [[평양]]에 '평양신학교'를 세우고, 채필근 목사가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서울]]에서는 김대현 장로가 중심이 되어, 김재준 목사를 교수로 '[[조선신학교]]'[* 현재의 [[한신대학교]]의 전신이다.]가 설립되었다. 한국의 신정통주의는 장공 김재준(1901-1987) 목사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유학한 후 귀국하면서 도입되었으며, [[조선신학교]]의 교수로 오게된 것이 이후 [[조선신학교]]의 성향과 발전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성경 비평을 학문적으로 도입한 신정통주의 신학의 김재준과 몇몇 비교적 진보적인 신학을 하던 목사들이 이 학교의 교수가 되면서 이 학교의 신학교육은 (신학적으로) 진보적이게 되었고 이에 대해 기존 교단의 적지않은 사람들이 반발했다. 그래도 이러한 내분은 어차피 일제가 아예 내선일체의 일환으로 조선 장로교를 다른 종파들과 모두 합쳐 일본 기독교에 흡수시켜버리려는 의도 때문에 이때까지는 딱히 표면화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