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길산 (문단 편집) === 조선왕조실록 === [[조선왕조실록]] 기준으로 장길산에 대한 이야기는 3번 나오는데, 숙종 18년과 숙종 23년 기사이다. 18년 기사는 장길산을 놓친 양덕 현감을 벌주라는 일반적인 내용이지만 운부, [[정도령]]과 엮이는 23년 기사는 그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다. >날이 저문 뒤에 이절(李梲)·유선기(兪選基) 등이 상변(上變) 하기를, >"어느 날 이영창(李榮昌)이 이절의 집에 와서 자면서 갑자기 묻기를, ‘그대가 장사지낼 땅을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 스승을 가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스승이란 중은 바로 '''운부(雲浮)'''로서, 당시 나이 70세로 송나라 때의 명신(名臣)이었던 왕조(汪藻)의 후손인데, 명나라가 망한 뒤 중국에서 표류하여 우리 나라에 도착하였으며, 머리를 깎고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갔는데, 그 사람은 위로는 천문(天文)을 통달하고 아래로는 지리를 통찰하고 중간으로는 인사(人事)를 관찰하여 재주가 옛날의 [[제갈량|공명(孔明)]]과 [[유기(명나라)|유기(劉基)]]에 밑돌지 않는다는 자였습니다. 그가 불경(佛經)을 승려의 무리들에게 가르쳤는데, 그 중에서 뛰어난 자로는 '''옥여(玉如)·일여(一如)·묘정(卯定)·대성(大聖)·법주(法主)''' 등 1백여 인을 얻어 그 술업(術業)을 가르치면서 팔도(八道)의 중들과 체결(締結)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장길산(張吉山)'''의 무리들과 결탁하고, 또 이른바 '''[[정도령|진인(眞人) 정(鄭)]]·최(崔)''' 두 사람을 얻어 먼저 우리 나라를 평정하여 정성(鄭姓)을 왕으로 세운 뒤에 중국을 공격하여 최성(崔姓)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하였습니다." >(중략) >임금이 또 국청(鞫廳)에 하교(下敎)하기를, >"극적(劇賊)[* 범죄의 규모가 큰 도둑이라는 의미이다.] 장길산(張吉山)은 날래고 사납기가 견줄 데가 없다. 여러 도(道)로 왕래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한데,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번 양덕(陽德)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체포하려고 포위하였지만 끝내 잡지 못하였으니, 역시 그 음흉함을 알 만하다. 지금 이영창(李榮昌)의 진술함을 관찰하니 더욱 통탄스럽다. 여러 도에 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하여 있는 곳을 상세하게 정탐하게 하고, 별도로 군사를 징발해서 체포하여 뒷날의 근심을 없애는 것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 >[[http://sillok.history.go.kr/id/ksa_12301010_003|숙종실록 31권, 숙종 23년 1월 10일 임술 3번째기사 / 반역 모의에 관련된 이절·유선기 등은 복주되고 이익화·장영우 등은 귀양 보내다]] 중 >국청(鞫廳)에서 죄인 이영창(李榮昌)을 다시 추문(推問)하자, 말을 변경해서 공사(供辭)를 바쳤는데, 대략에 이르기를, >"이형징(李衡徵)이 윤두서(尹斗緖)·윤창서(尹昌緖)와 같이 찾아 왔기에 그대로 그들과 함께 심단(沈檀)의 집으로 갔더니, 심단의 아들 심득천(沈得天)과 윤두서가 은전(銀錢)을 후하게 주면서 말하기를, ‘우리가 김춘택(金春澤)과는 원한을 맺었으므로, 그가 반드시 죄를 꾸며서 해치려고 할 것이니, 그대가 모름지기 상세하게 엿보고 탐지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심득천이 죽은 뒤에 가까이서 유선기(兪選基)·이절(李梲)과 서로 친밀했다는 뜻을 심단과 윤두서 등에게 말하니, 윤창서가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일찍이 환국(換局)을 도모하다가 유배당했었다. 이들은 틀림없이 불량한 일을 할 것이니, 그대가 모름지기 잘 처리하라.’고 하였는데, 탐지한 지 수일 뒤에 가서 이절 등을 보니, ‘우리가 어지러움을 틈타 일어나려고 이미 군장(軍裝)과 마필(馬匹)을 갖추었다.’고 하면서 내어 보이므로, 즉시 그 말을 심단 등에게 전하니,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손수 쓴 필적(筆跡)을 얻은 연후에야 착실하게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김경함(金慶咸)은 개국 충신(開國忠臣)이란 말을 들어서 알고 돌아가 윤두서의 무리에게 보이니, 이형징이 인해서 [[정성공|해상(海上)의 정씨(鄭氏) 성(姓)을 가진 자]], 옥여(玉如)·정학(鄭涸)·최헌경(崔憲卿) 등 및 삼광 사한(三廣四漢)이란 말을 지어내고, 또 신건(申鍵)의 은(銀)과 인삼에 대한 말과, '''장길산(張吉山)과 관계를 맺은 상황과 여인(女人)이 소를 탄 상황을 지어내어''', 그것으로 이절의 무리를 속이고 미혹되게 하였으며, 일여(一女)와 혜일(惠一)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서로 아는 터이며, 풍열(楓悅)이 이름난 중이란 것을 빙자해서 말하고, 여러 절의 이름과 다른 지역의 이름은 더러는 혜일에게 배웠고, 더러는 자신이 지어 낸 것이었으며, 묘정(卯丁)이란 이름도 자신이 지어 내어 이절 등에게 보여 세력이 확대됨을 보이려는 뜻이었고, 지난날의 거짓 초사는 과연 윤두서·이형징 제인(諸人)과의 약속을 매우 굳게 하였으며, 또 은화(銀貨)를 받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차마 바로 고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 >[[http://sillok.history.go.kr/id/ksb_12302016_001|숙종실록보궐정오 31권, 숙종 [보궐정오실록] 23년 2월 16일 정유 1번째기사 / 국청에서 죄인 이영창을 다시 추문하자 말을 변경해서 공사를 바치다]] 뭔가 [[정감록]]에 등장하는 [[정도령|정진인]]이 언급되고, 왕조를 뒤엎고, 중국을 공격하고, 온갖 이야기가 다 돌아다니는데, '''정작 장길산의 역할은 조력자 수준'''에 가깝다.[* 첫번째 기사 중 발췌된 부분의 주체는 장길산이 아니라 운부이다. 이 때문에 [[이덕일]] 같이 뒷이야기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운부에 집중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유명하고 규모있는 범죄를 많이 저질렀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딱 그 정도. 사실 저 사건은 애꿎은 장길산을 끌어들여서 상대 파벌을 모함한 정치 사건에 가깝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