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경왕후 (문단 편집) == 생애 == [[본관]]은 [[파평 윤씨|파평]]. 파원부원군 윤여필의 딸이다. 어린 시절 큰이모인 [[월산대군]]의 아내 [[승평부대부인]] 박씨의 집에서 자랐고 남편 [[중종(조선)|중종]]이 즉위한 해에 내명부 종2품 숙의(淑儀)로 책봉되어 중종의 [[후궁]]이 되었다. 중종의 첫 왕비인 [[단경왕후|신씨]]는 하필 본인의 아버지인 [[신수근]]이 폐주 [[연산군]]의 처남이었던 터라 [[고령 신씨|친정]] 전체가 [[역적]]이 되었기 때문에 [[중종반정|반정]] 세력의 요구에 따라 7일만에 폐출되었다. 이후 비어진 [[왕비|국모]]의 자리에 숙의 윤씨가 [[왕비]]로 간택되는데 장경왕후의 친정은 대대로 [[왕비]]를 배출할 만큼 당대 최고 명문가였던 [[파평 윤씨]] 가문이고[* 중종의 모후인 [[정현왕후|자순대비]]와 같은 집안이다.] 결정적으로 외삼촌이 [[중종반정]]의 1등 공신인 [[박원종]]이었으며 [[월산대군]]에게는 처조카가 되니 정황상 장경왕후가 [[중종(조선)|중종]]의 [[후궁]]들 중 다음 [[왕비]]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비|계비]]가 된 이후 [[1511년]](중종 6년)에는 중종의 맏딸인 [[효혜공주]][* 효혜공주가 [[김안로]]의 아들 김희와 혼인하면서 [[사돈]] 관계가 된다.]를 낳았고 [[1515년]](중종 10년)에는 적자인 [[인종(조선)|원자]]를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엿새 만에 25세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튿날 새벽 병세가 매우 중해지자 일어나 앉아 손수 글을 써서 상께 아뢰기를 '어제 첩의 마음이 혼미하여 잊고 깨닫지 못하였는데 생각해보니 지난해 여름 꿈에 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 [[인종(조선)|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억명(億命)'이라 하라 하므로 써서 벽상에 붙였었습니다.'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중종 10년([[1515년|1515]]) 3월 7일 4번째 기사 죽기 전에 당시 원자였던 [[인종(조선)|인종]]의 이름을 억명으로 지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이렇게 지어야 오래 산다고 하였는데 나중에 [[인종(조선)|인종]]은 [[피휘]]하기 위해서 '호(峼)'로 이름을 고친다. 장경왕후가 죽은 후 왕비로 책봉된 [[문정왕후|중종의 셋째 왕비]]는 장경왕후에게 삼종질(9촌 조카)이 된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희릉]](禧陵)'''[* 이 능은 사연이 참 많은데 처음에 묻힐 때 [[무덤]]을 조성하던 과정에 그 자리에 돌이 20수레나 나왔다고 하여서 몇 자 아래에 묻히게 되었다. 자그마치 20년 뒤에 [[김안로]]가 언급해서 천장하고 그 때 있던 사람들 벌을 주는데 말이 "왜 [[왕비|국모]]를 그딴 곳에 묻냐"는 것이지, 사실은 [[정광필]]을 벌주기 위함이었다. 또 나중에 [[중종(조선)|중종]]이 죽으면서 같이 묻혔는데 [[문정왕후]]가 [[대왕대비]] 시절 [[중종(조선)|중종]]의 곁에 묻히고 싶어서 묘소를 옮겼지만 [[문정왕후]] 사후 [[중종(조선)|중종]]이 또 묘소가 현재의 [[서울특별시|서울]] [[강남구]] 지역인 [[선정릉]] 구역으로 옮겨지면서 중종의 세 [[왕후]] 중 어느 쪽과도 먼 곳에 묻히게 되었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