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오군란 (문단 편집) ==== 반론 ==== 위의 주장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데,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에 대원군은 능동적으로 고종에게 위협을 가할 만큼 권력이 강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고종이 대원군 때문에 구식 군인들을 경계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일단 대원군이 물러난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권력 장악을 노렸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임오군란과 시기상 가장 가까운 대원군의 권력 장악 시도는 1881년, 즉 임오군란부터 1년 전에 있었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8160|이재선 추대 사건]]이다. 이 사건의 주동자는 이재선과 기타 반민씨 세력이었으나, 사건을 획책한 배후로 대원군이 지목되었고, 만약 이 시도가 성공했다면 대원군의 재집권이 가능했으리라고 충분히 가정할 수 있다. 근데 이 사건은 한편으론 대원군의 위세가 1881년에는 상당히 보잘것없었다는 증명도 된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재선 세력이 쿠데타에 동원하려고 했던 병력 수가 고작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21785|1,000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해 우발적으로 벌어진 임오군란에서 추가로 합류한 무장한 백성들만 10,000명에 달했다는 걸 생각하면 계획적인 쿠데타치고는 터무니없이 적은 병력이고, 심지어 이 병력의 동원에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 계획된 병력을 다 동원해도 성공 여부가 불투명한 마당에 병력도 거의 모의지 않자 쿠데타에 회의적인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에 이재선과 주동자들은 이번엔 300명으로 강화도를 점령한 뒤 그 병력으로 수도를 공격하자는 더더욱 무리수가 심한 계획을 세웠고[* 강화도 주둔 병력이 과연 쿠데타 측의 명령을 들을지도 의문이고, 또 강화도 점거에 걸리는 시간이 길어지기라도 하면 당연히 경군 쪽에서 대비할 시간이 생겨 쿠데타가 성공할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든다.] 결국 이마저도 병력을 포섭할 자금 부족으로 실패, 결국 쿠데타에 회의적인 내부 고발자 발생으로 이재선 추대 음모 세력들은 모조리 뿌리 뽑히게 된다. 당연한 소리지만, 고종이 의도적으로 구식 군인들을 홀대했다는 주장처럼 대원군이 구식 군대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면 굳이 이런 황당무계한 음모를 획책했다가 남은 자기 세력마저 숙청당하는 짓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경군 내 자기편을 통해 군사를 일으키면 그만이니까. 결론적으로, 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으로 군 지휘 체계가 아예 붕괴되기 전까지는 스스로 군대를 동원할 역량이 전혀 없었고, 고종이 임오군란에 했던 대처는 결과적으로 권력욕은 엄청나지만 세력이 없어서 실패하던 대원군에게 알아서 칼자루를 바친 짓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대원군이 실제로 구식 군대를 동원해 권력을 장악할 만한 현실성은 차치하고서라도, 고종이 그런 의심을 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고종의 구식 군대 홀대는 과연 올바른 조치였을까? 당연히 아니다. 진짜로 구식 군대가 위협 세력이라고 느꼈다면 일단 수뇌부를 기습적으로 제거하거나 무장 해제를 시도하는 방식을 먼저 택해야 했다. 총은 총대로 그대로 들려놓고 이렇게 군인들을 가지고 놀았다면 이건 불온 세력을 견제하는 게 아니라, 멀쩡한 군인들마저 불온 세력으로 만드는 짓밖에는 되지 않는다. 만약 고종의 의도가 진짜 이것이었다면 오히려 더더욱 멍청이라는 증명밖에는 되지 않는다. 물론 아무리 암군으로 비판받는 고종이라도 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