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오군란 (문단 편집) ==== 누가 청군을 불렀는가? ==== 일단은, 군란의 과정에서 [[명성황후|중전 민씨]]가 은신처를 제공한 윤태준을 통해 [[고종(대한제국)|고종]]에게 밀서를 넣어 청에 군대를 파병해 줄 것을 요청해서 대원군이 청으로 끌려갔고, 이 때문에 조선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종전까지의 교과서 내용이자 학계의 정설이었다. [[2006년]] 7월 1일, '임오유월일기'가 발견되면서 당시 중전의 행동반경이 알려졌다.[[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375100026&ctcd=C09|#]] 이 일기는 음력 6월 10일 궁에서 탈출한 이후 6월 13일부터 환궁하기 직전인 8월 1일까지의 날씨와 동정, 주변 인물들의 행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중전은 2달이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한성, 경기도, 충청도를 거치며 이동하였다. 심지어 이 와중에 인후염과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한다. 자세한 이동 경로는 다음과 같다. > [[창덕궁]] → [[한성부]] 관훈동 → [[경기도]] [[광주시|광주부]] 적취리[* 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 노상동과 적취리가 합쳐져서 상적동이 되었다.] → 광주부 조현리(새오개)[* 경기도 광주시 목현동 새오개] → 경기도 [[이천시|이천군]] 읍내 → 경기도 [[여주시|여주목]] 단현리 → [[충청도]] [[충주시|충주목]] 감곡면(장호원)[* 현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성당 부근. 감곡성당은 군란 14년 뒤인 [[1896년]] 조선 땅에서 18번째, 충북에서 최초로 생긴 성당이다. 당시에는 현재 이천시에 있는 장호원까지 모두 충주에 속했다.] → 충청도 충주목 노은면[* 현 충북 충주시 노은면 가신3리.] → 충청도 충주목 감곡면 → 경기도 지평현 상동면[* 현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양근군과 지평현이 합쳐져서 생긴게 양평군이고, 상동면은 양동면으로 개칭되었다.] → 충청도 충주목 감곡면 → 경기도 [[안성시|안성군]] 읍내 → 경기도 [[양지면|양지현]] 읍내 → 경기도 [[용인시|용인현]] 읍내 → 경기도 용인현 [[포곡읍|포곡면]] 신원리 → 창덕궁 환궁 경기 감영에 자신의 생존을 알린 것이 음력 7월 4일, 서울의 상황을 알아보게 사람을 보낸 것이 7월 15일인데 대원군이 청군에 억류된 것이 7월 13일, 끌려간 것이 7월 15일이다. [[홍계훈]]은 충주까지 동행하여 [[양주시|양주]][[목사]]에 임명되었으며, 여비 500궤미를 내놓은 조충희는 [[전라남도]] [[영광군|영광]][[군수]]에 임명되었다. 서울과 충주를 계속 왕래하며 정보를 수집하던 [[북청군|북청]] 물장수([[보부상]]) [[이용익]]이 바로 이때의 공로로 천거된 인물이다. 흔히 청군은 중전 민씨, 혹은 민씨 일파가 요청하여 파견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장 박시백은 자신의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어떠한 통보도 없이 영선사 김윤식만이 중차대한 파병을 홀로 요청할 수 있는가?"라며 민씨와의 소통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말라리아로 고생하던 민씨가 김윤식과 소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기록에도 없다. 그래서 소거법으로 따지고 보면 '''고종'''밖에 남지 않는데, 따라서 고종이야말로 청에 밀서를 보낼 만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 보기도 하나, 이 역시 물증은 없다. 그러나 파병은 예로부터 군 통수권자의 고유 권한이며, 군 통수권자에게 그만한 외교권을 행사할 수 있는 건 국가원수 정도뿐이니, 국가적으로 중대한 문제인 만큼 적어도 고종이 직간접적으로 관련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김윤식(조선)|김윤식]]과 [[어윤중]]은 사건이 일어날 당시엔 벌써 고종에 의해 영선사로 발탁되어, 청에 체류 중이었다. 반대로 청이 조선 국내의 누군가로부터 원병 요청을 받고 파병한 것이 아니라 미리 조선에서의 '급변 사태'를 첩보를 통해 파악한 상태였고 그런 상태에서 조선으로의 파병을 결정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애초에 일본과 마찬가지로 '''청도 조선에 대한 첩보 활동을 벌이고 있었으며'''[* 청으로서는 베트남에 프랑스 세력이 진출해 있고 일본이나 다른 열강들이 은근히 조선을 노리고 있는 상태에서 청의 입장에서 코앞에 위치해 있는 조선과 베트남을 자국의 헤게모니 권역에서 떨어뜨리게 되는 상황은 막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도 조선에 대한 첩보 활동은 필수적이었다. 말하자면 [[순망치한]].] 그 과정에서 조선에서의 '급변 사태'를 감지, 상해에 3천 명의 군대를 주둔시켜 놓고 여차하면 인천으로 투입할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김윤식이나 어윤중은 청이 조선에서의 급변 사태를 파악한 상태에서 원병 파병을 타진하는 와중에 흥선대원군이 뭐하는 사람이냐, 그 사람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 등의 문제에 대한 청으로부터의 자문 요구에 응했던 정도였다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