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오군란 (문단 편집) === 청나라 군대의 파병과 진압 === 여기까지만 했어도 민란이 원인이 된 국내 정변 수준에서 사건이 끝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종 혹은 중전 민씨가(누가 청병했는지는 후술) 청나라에 군대 파병을 요청한다. [[청나라]]는 자국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여 흥선대원군이 청군의 군영을 방문한 틈을 타서 그를 [[톈진]](天津)으로 납치 감금한다. 대원군은 청군이 이렇게까지 비겁하게 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지만, 청군은 대원군을 잡은 그날에 톈진으로 보내버렸다. 이에 따라 섭정 통치는 끝나게 되었고 중전 민씨는 다시 궁궐로 돌아오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을 납치한 3일 뒤인 음력 7월 16일, 청군은 또한 구식 군인들이 많이 주둔한 [[왕십리]]와 [[이태원동]]을 습격하여 170명을 체포하였다. 그 뒤 반란을 주도한 11명이 처형당한다.[* 9명은 참수로 끝났으나 군인들의 지도자였고 장교 계급에 있었던 김장손과 유복만은 반란의 핵심 주동자라며 참수당한 뒤 시신까지 훼손되는 조선식 능지처참을 받았다.] 한편 군란으로 자국 공사관과 국민이 피해를 입게 된 일본은 조선에 즉각적인 배상 책임과 보상을 요청하게 되었고, 결국 조선은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여 모든 피해를 보상하게 되었고 일본은 이를 계기로 조선에 있는 자국 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시켜 경계를 강화하였다. 결국 임오군란은 구식 군대의 반란으로 시작하게 되었지만 그 끝은 결국 청과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국제 문제로 비화되었으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 조일 수호 조규 속약, 제물포 조약 등 청과 일본의 이중 외압의 심화를 불러왔으므로 본격적인 조선의 식민지화의 시작으로 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2년 후인 1884년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대(對)백성 사과문[*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907020_001|전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드물게 한 페이지를 가득 채워 수록했다.]과 함께 개화 의지를 천명하였고, 이 사건을 끝으로 기존의 개화 반대 세력은 중앙 정계에서 더 이상 주도권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유림들은 이후 대세를 바꿀 수 없다고 느꼈는지 문묘 종사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고종도 유림들을 달래주기 위해서 문묘 종사를 받아들여 [[김집]], [[조헌]] 등이 문묘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