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하영(1858) (문단 편집) == 평가 == 이하영이 미국 정부로부터 백만불(현재 원화로만 계산해도 11억 원)을 당겼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다. [[김옥균]]은 그로부터 불과 3년 ~ 4년 전 일본에 무상 차관을 빌리러 갔다가 실패했고, 차선책으로 [[국채|국채 발행]]을 시도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게다가 그 돈을 써서 미군을 빌려온다?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어쨌든 이하영이 미국에 돌려주지 않은 16만 불 중 얼마를 비상금으로 놔뒀는지는 몰라도, 당시 조선으로서는 막대한 돈이었을 텐데 그 행방이 투명하지 않다. 하여간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목돈을 만들라고 사람을 보내면 곱게 오는 경우가 없었다. 원래부터 부패 집단인 [[수구파]]들은 고사하고, [[갑신정변]]을 말아먹은 [[김옥균]] 역시 1882년 [[제물포 조약]] 직후 일본에 가서 받은 17만 엔을 귀국해서는 수중에 한 푼도 안 남았다고 하는 걸 보면, 용처가 개혁을 위한 군자금이었다고 해도 불투명하다는 지적을 면할 수 없고(한성순보를 창간하는데 썼다고도 한다), 결과적으로 개혁에 독이 됐다. 당시 아직 입장을 정하지 않았던 많은 중도적 정부 인사들마저 등 돌리게 만들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884년 무상 차관을 준대서 김옥균이 일본에 갔건만 수구파들이 뒤에서 방해(비자금 루머 퍼뜨림)했고 결국 일본 정부한테 찬바람을 맞았었다. 1882년 [[임오군란]] 역시 불량미라는 불투명한 재정 집행이 도화선이 된 참사였다. 리더라는 사람들이 이 모양이었던 구한 말을 돌이켜볼 때 고종 옆에 있었던 인간들에게 근대화를 믿고 맡기기에는 경제적 식견이나 정치적 리더로서의 도덕성, 정치력 그 어떤 것도 부족하게만 보인다. 이하영은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에, 2007년 대한민국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의 친일 반민족 행위 195인 명단에 올랐다. 2008년 민족 문제 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 인명 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도 선정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