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종운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부산 감천초등학교, [[부산대신중학교]], [[경남고등학교 야구부|경남고등학교]], [[동아대학교 야구부|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89년 신인드래프트를 통해서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leejongwoon.jp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sportsseoul.com/l_2014110101000014400138231.jpg|width=100%]]}}}|| 1991년부터 1994년까지 4년 동안이 전성기였다. 특히 1992년 우승 때는 .314의 타율과 21도루로 [[남두오성]]의 일익을 담당했고, '''14개의 3루타'''를 쳐내 '''단일 시즌 최다 3루타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2014년 9월 6일 롯데전에서 [[서건창]]이 그 기록을 15개로 경신하는 장면을 바로 그 현장에서, 그것도 상대 팀 코치 입장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늘 [[김응국]]과 [[전준호(1969)|전준호]]라는 걸출한 [[외야수]]에 밀려 나머지 한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해야 했다. 1996 시즌 초반 미친 듯한 맹타를 휘두르며 기량이 만개하나 싶었지만, 6경기만에 경기 도중 다리 골절 부상으로 시즌 아웃 판정을 받고 다시는 예전 기량을 회복하지 못했다. 1997년 10월 3일 외야수 강대호를 상대로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되었으며, 1998 시즌 후 거기서 은퇴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10327165304892G.jpg|width=100%]]}}} || || (출처 : 포토로) || 마지막 1시즌만 뛰고 은퇴한 [[한화 이글스]] 현역 선수 시절. 이 시기에 한화에서 뛰고 있던 [[장종훈]]과 친분이 생겼다고 한다. 베트를 짧게 쥐고[* 당시 이종운은 리그 전체에서도 가장 배트를 짧게 쥐는 선수였다. 거의 한 뼘 이상 짧게 쥐었을 정도.]커트를 해가며 원하는 공을 골라 안타로 연결시키는 스타일의 타자였다. 주력도 준수해서 팬북에는 100m를 12초 플랫에 끊는다는 말도 있었다. 델동님이 되면서 이미지를 많이 망쳐서 그렇지 짧은 전성기의 이종운은 지금의 [[이용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발 빠른 타자였다. 다만 이종운보다 좀 더 정교하고 좀 더 발이 빨랐던 [[전준호(1969)|전준호]]와 이종운보다 역시 좀 더 정교하고 발 빠르기는 비슷했으며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할 수 있는 장타력이 있었던 [[김응국]]에 좀 가려진 면이 있다. 하지만 [[서건창]]이 깨기 전까지 최다 3루타 기록을 20년 넘게 지켜올 정도로 전성기의 주루 센스는 탁월한 편이었다. 수비에서는 의외로 돌글러브 기질이 좀 있었다. 특히 [[염종석]]의 승을 날려먹는 멋진 실책은... 당시 직관 갔던 사람의 말에 의하면 공을 놓치자 마자 온갖 육두문자와 함께 외야 관중석에서 오물이 날아들었다고. 오래된 팬들은 실력에 비해서 캐릭터가 부족했던 선수로 기억하는 면이 강하다. 전준호같은 독기도, 김응국같은 다재다능함도 없었고 전성기가 길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롯데의 마지막 우승에 크게 공헌한 것은 사실이며 감독으로서의 실책이 아무리 많았다 해도 이 조차 희석되어서는 안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