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순신(무의공) (문단 편집) == 생애 == 입부 이순신은 1554년 [[경기도]] [[시흥군|금천현]] 서면 일직리(현 [[광명시]] [[일직동]])에서 [[양녕대군]]의 5번째 서자인 장평도정(長平都正)의 4대손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완원군(完原君) 이진(李眞)과 [[안동 김씨]] 성균관 진사 김구수(金龜壽)의 딸인 정경 부인 김씨의 5남으로 태어났다. 나이는 [[이억기]]보다 7살 많지만 [[항렬]]상으론 이억기가 할아버지뻘[* 이억기는 정종의 10남 덕천군(德泉君)의 4대손으로 심주군(沁洲君) 이연손(連孫)의 아들이다.]이 된다. 선조와는 14촌 형제간이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온성판관·의주판관 등을 거쳐 잠시 귀향했다가 혜산진 병마첨절제사(惠山鎭兵馬僉節制使:종3품)가 되었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4901|#]] [[임진왜란]] 발발 당시에는 방답진 수군첨절제사(종3품)였으며, 칠천량 해전 이후에는 도망간 [[배설(조선)|배설]]의 후임으로 경상 우도 수군 절도사(정3품)로 승진하였다. 전쟁 기간 내내 충무공 휘하에서 수군 지휘관으로 일했다. 중위장·전부장으로 옥포·합포·적진포·당포·한산도·부산포 해전 등에서 활약하였고 9번을 선봉으로, 1번을 중군으로 임해 큰 공을 세웠다. 충무공이 특별히 그의 군공을 적시하여 포상을 주라고 조정에 올렸을 정도였다. 이후 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탄에 전사하자 바로 그 자리에서 부대를 이끌고 개선하여 전투를 마무리지었다. 그 공으로 명나라 제독 진린에 의해 충무공의 후임 통제사로 천거받았다. 1599년[* [[선조(조선)|선조]] 32년] 1월 수사 직에서 물러나 포도대장 겸 도총관 총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년 뒤 [[충청도|충청]] 수사 · [[수원시|수원]] 부사 · [[경상도|경상]] 부사를 역임하였다. 1601년에는 [[황해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지만 [[뇌물]]을 받은 혐의로 파직되었으며, 이후 다시 복직하여 1604년 첨지부사가 되었고,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같은 해 1604년부터 [[전라도|전라]] 방어사·수원 부사·[[함경도]]병사(咸鏡道兵使) 등을 역임하였고 1607년에는 완천군(完川君)에 봉직되었다. 이후 전라 병마 절도사, 포도대장, 훈련대장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지냈다. 1611년[* [[광해군]] 3년] 9월 2일에 58세로 별세하여 [[경기도]] 시흥군 서면 일직리[* 현 [[광명시]] 일직동]에 장사되었다. [[인조]] 때 증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追贈)되었으며, 1679년[* 숙종 6년]에 무의(武毅)라는 시호를 제수받았다. 보통 기록에서 이순신의 무예가 뛰어났다는 이야기는 바로 무의공 이순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충무공도 보통 이상의 무예이기는 했지만 무의공은 무예도 우수하고 충무공을 보좌해 여러 가지 전공을 세운 능력있는 장수라고 볼 수 있다. 나름대로 준수한 장수였지만 이름이 같은 상관의 명성이 워낙 높은지라 초라해보이는 인물. 다만 오히려 이름이 같아서 나대용 정도를 제외한 충무공의 부관 중에는 제법 유명한 편이다. 다만 청렴한 충무공과 달리 무의공은 청렴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는데, 충무공 이순신 휘하의 장수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뇌물 수수 혐의로 탄핵받아 사임한 적도 있다. 이외에도 뇌물 수수 및 부정을 저질러 여러 번 탄핵받은 기록이 있어서 본인의 명성에 흠이 많이 있는 편. 충무공과는 공적으로는 상관과 부하의 관계였으나 사적으로는 허물없이 가까운 친구였다. 그래서 2명의 이순신은 전투가 없는 날은 같이 [[승경도]]를 하거나 활쏘기를 하면서 같이 놀았다. 특히 충무공이 [[백의종군]]을 하게 되자 무의공이 제일 먼저 술을 들고 찾아와 밤새 둘이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기록이 충무공의 난중일기에 적힐 정도. 아무래도 본인들이 흔치 않은 이름의 동명이인 겸 무관 선후배라는 인연으로 만났다는 우연에 대한 의식, 그로 인한 친밀감이 상당히 깊었을 가능성이 높다. 묘는 [[광명시]]에 있는 서독산에 위치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거처도 당시 기준으로 [[경기도]] [[금천구|금천현]] 서면 일직리였다. 이 지역 일대가 일제 강점기에 경기도 [[시흥시]] [[서면#s-2.2|서면]]을 거쳐 지금의 광명시 일직동으로 들어간 셈.] 고속철도 [[광명역]] 근처이다. 향토 유적 제4호이며, 산 아래에서도 잘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