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성순 (문단 편집) == 생애 == [[평안북도]] [[신의주]] 오일동 출신으로 [[부농]] 이기정(1878 ~ 1943)과 그의 셋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5살 위인 형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458095&cid=42876&categoryId=42876|이성덕]]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전일본빙상선수권대회와 [[1936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참가할 정도의 엘리트 [[체육]]인이었다. 그에 반해 이성순은 어릴 적부터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을 정도로 골목대장 노릇을 했었다. 보증을 잘못 들어 집안이 어려워지자 이성순은 1932년부터 밀무역인 '도비노리'에 뛰어든다.[* 도비노리(飛び乗り)란 [[일본어]]로 '뛰어서 탄다'는 뜻으로 세관원의 눈을 피해 달리는 열차가 느려지는 때에 빠르게 올라타 중간에 타고 내리는 [[밀수]] 수법을 말한다. 당시의 열차 속도가 시속 35~40km 정도로 지금에 비하면 현저히 느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위험한 짓거리인지라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며 적잖은 요령과 신체 능력이 동반되어야 했다. 여담으로 이 열차 주행시 승하차는 밀수꾼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의 철도회사 직원들도 엄연히 정식 업무로 하던 스킬이었다. 당시에는.''' 심지어 미국에는 교범 영상도 남아있다. 지금은 화차 돌방금지와 더불어 했다가는 큰일난다.] 이 시절 이성순은 실수로 열차 밑으로 들어가 죽을 뻔 했었으나 기적적으로 열차에 올라탔고 이 때 '시라소니'라는 [[별명]]을 얻어 평생 본명보다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 때의 시라소니는 동물 [[스라소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도]]에서 '못나거나 혼자 뒤떨어지는 사람'을 뜻하는 용어라고 하지만[* 이는 [[야인시대]] 1부에서 [[장도리#s-2]]가 언급한 바 있다.], '호랑이도 자식이 여럿이면 시라소니를 낳는다'는 속담이 있는 것을 보면 양자가 무관한 표현이라 보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못난 호랑이 새끼'라는 언급이 틀린 말은 아닌 셈.] 그가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는 [[평양시|평양]] 제일의 싸움꾼 [[박두성]]을 이긴 것이며 이후 [[중국]] 전역을 떠돌며 활약했다. 신의주 칼잡이 김장손과의 싸움, 상하이에서 칼잡이 아오끼의 싸움, 베이징에서 야쿠자 두목 구로야마와의 싸움, 베이징에서 쿵푸 대가 마오와의 싸움, 만주 [[선양시|봉천]]의 호랑이 이상대와의 싸움, [[상하이]] 독수리 장천용과의 우정, 천진에서 일본 [[야쿠자]] 카네미야 일당과 40:1의 싸움 등 여러 무용담이 있으나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는 자료들이 사실상 거의 없다. 당시 [[만주]] 지역은 [[동아시아]]의 화약고 지역이자 정치적, 사회적, 군사적으로 온갖 세력들이 즐비했기 때문에 '동양의 서부'로 불리던 시절[* 훗날 한국 영화계에서 이런 점에 착안해서 만주를 배경으로 한 [[서부극]]인 소위 [[만주 웨스턴]]이 등장한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 같은 해 나온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역시도 이러한 만주의 지리적 특징에서 기인한 영화이다.]이라 정말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면 기록이 없을 리가 없다. 이외 알려진 점은 [[베이징|북경]]에서 치에코라는 [[여성]]과 만나 살림을 차렸지만 잠시뿐이었다. 대중매체에서는 상하이에서 명성을 떨친 것으로 나오기도 한다.[* [[야인시대]]에서는 이화룡과 함께 스테이크를 먹으며 상하이에서 많이 먹어봤다고 말하고 [[감격시대]]는 아예 상하이가 배경이다.] 그의 주특기는 장거리에서 뛰어드는 박치기인 공중걸이 [[박치기]] 지만 어쩌다 한번 쓰는 일격의 필살기술이며, 온몸이 무기라 할 만큼 강해 주먹이든 발차기든 단연 최고였다. [[대중매체]]에서는 이성순이 아무런 수련을 거치지 않은 싸움의 [[달인]]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어린 시절부터 [[운동]]을 거르지 않았을 뿐더러 1934년에는 [[백두산]]에 올라가 훈련도 했었다고 한다. 해방 후 월남하여 [[서울특별시|서울]]에 와서 이북 출신 [[조폭]]들의 큰형님 격으로 이북 출신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서북청년단은 당시 이북 출신들인 [[이화룡]]과 [[정팔]]의 압록강동지회와 대동강동지회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서로 조직은 분화되었지만 공동의 목표를 두면서 단합하는 성격이었다. 이 가운데 이성순이 옵저버 역할을 하면서 중재를 담당했는데 정식 직함은 압록강동지회 감찰부장.[*출처 대한민국 건국청년운동사(1989, 건국청년협의회), 청년운동 반세기(경향신문 1987. 02. 25).] [[6.25 전쟁]] 시기에는 서북청년단 인원으로 구성된 [[KLO]] 부대원으로 전쟁에 참가했고 3.1공수유격단의 부부대장 자격으로 한국군 최초 공수강하훈련을 교육했었다는 주장이 있다. || [[파일:external/img.bemil.chosun.com/%BD%C3%B6%F3%BC%D2%B4%CF%C0%CC%BC%BA%BC%F8%C4%A3%C7%CA.jpg|width=70%]] || || [[파일:external/pds109.cafe.daum.net/download.php?grpid=Uzlo&fldid=LKnS&dataid=73034&fileid=2®dt=20081227030138&disk=15&grpcode=ssaumjil&dncnt=N&.jpg|width=100%]] || || 이성순의 아들 이의현이 공개한 증거 자료. || 당시 아들이 사이트에 남겼던 설명에 따르면, 사진에 적힌 글씨는 사진을 보는 이들 기준이 아닌 사진에 찍힌 병사들 기준이다. 즉, 사진에서 이성순은 우측 하단의 키 큰 사람이며 그 오른쪽이 소대장이다. 이성순의 큰 키를 알 수 있다. 6.25 전쟁 이후 [[김두한]]이 [[국회의원]]이 되어 조직을 해산한 이래 서울의 조직폭력계는 이화룡이 이끌던 [[명동]]파와 [[이정재(조직폭력배)|이정재]]가 이끌던 [[동대문]]파로 양분되었는데, 시라소니는 [[1.4 후퇴]] 당시에 [[부산광역시|부산]]에서 수많은 깡패들에게 린치를 당하던 이정재를 구해준 인연으로 명동파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유일하게 이정재의 사무실에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성순이 돈을 뜯어가며 동대문 시장의 점포 양도 문제로 이정재와 충돌하게 된다. 처음은 굶주리고 갈 곳 없는 KLO 대원들을 위해서 돈을 2번 빌리고 점포양도를 구했고, 마지막은 50만환(5억원)에 달하는 거금을 내달라고 하며 '서북청년회 출신 상이 군인들에게 동대문 상가의 점포를 내달라' 라는 요구였지만 사실 그 이전에도 이성순은 이정재에게 수시로 돈을 뜯어갔었다. 이 때문에 동대문패의 간부인 [[김기홍(조직폭력배)|김기홍]], [[조열승]], [[임화수]] 등 간부들이 이성순에게 분노하고 이정재도 자존심이 많이 상해버렸다. 그래서, 이권의 분산과 조직의 위계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염려한 이정재는 시라소니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좁은 사무실로 유인하여 몽둥이, 둔기, 손도끼 같은 흉기로 시라소니를 잔혹하게 때렸다. 이후, 1983년 그가 사망했을 당시 <[[동아일보]]>에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301270020921001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3-01-27&officeId=00020&pageNo=10&printNo=18866&publishType=00020|과거 린치 사건을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당시 이정재의 부하 20명 정도가 미리 대기를 하고 있다가 집단으로 때렸다고 한다. 이정재의 사무실 앞에서 10대 건달 10명을 때려 눕힌 후, 사무실 안으로 진입하였는데 무장한 이정재 부하 20명과 싸움을 하다가 전화선에 걸려서 넘어지고 그 틈을 타서 갈고리, 낫, 도끼 등으로 난자당하면서 린치를 당했다. 야인시대에서는 석회가루를 눈에 뿌려서 시야를 가린 뒤에 집단으로 폭행한 것으로 묘사된다.[[https://youtu.be/mCRAOtka19I?t=1124|야인시대의 영상]] 이후 청계천에 망태로 싸서 버려졌는데 행인의 발견으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아무튼 이성순은 당시에 종로 5가의 반도병원[* 지금의 보령약국이 있는 자리다.]으로 옮겨졌고 얼마 뒤에 [[인제대학교 백중앙의료원|백병원]]으로 [[의료전달체계|이송됐다]]. 이 사건 이후부터 시라소니의 인생은 내리막을 걷게 된다. 당시 부상이 너무 참혹해서 [[의사]]가 "[[시체]]인 줄 알았다" 라고 언급했을 정도고 후유증 또한 마찬가지로 심각했다. 그걸로 끝난 게 아니라, 이 사건으로 백병원에 입원한 그를 이정재의 부하인 [[이석재]]를 시켜 후환을 없앤다는 의도로 단독으로 병원으로 찾아가서 나머지 다리도 부러뜨렸다. [[신상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시라소니는 이정재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 두었으나 이를 실행하기 직전에 김두한과 이정재가 화해를 하는 바람에 그냥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이후로는 거의 폐인이 되면서 [[장티푸스]]에 걸린 적도 있고 쓰러져서 쓰레기장에서 발견된 적도 있다고 한다. 도중에 3.1 공수유격단 창단식에 부부대장으로 참가하고 [[신익희]]와 [[장면]]의 경호를 맡기도 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에 군사 [[정권]]이 구악 일소라는 명분 아래에 조직폭력배들을 일제히 검거할 때 이성순도 체포되었지만 [[영락교회]] 신자들의 탄원으로 풀려나왔다. 구속 중이던 이정재를 추가 기소하기 위해 당시 [[검찰]]에서 방증을 수집하는 도중 시라소니 폭행 사건의 조사를 위해 이정재와 대질 심문도 했는데[*출처 '이석재와 이정재는 이성순이란 사람을 도끼로 때려 중상해를 입힌 사실을 발견 수사를 재개'. - 동아일보 1960. 05. 29] [[대인배|린치 사실을 부인하면서 이정재를 감쌌다]]고 했다. 실제로, 사건과 관한 조사가 검찰에서 실시된 기록이 있으나 이정재의 재판 당시 수많은 죄상 가운데 해당 사건과 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처벌불원에 따른 공소권없음 [[불기소처분]]으로 보인다.[*출처 국가기록원 나라기록] 결국, 인생의 허망함을 느낀 시라소니는 결국 이정재의 처형 이후부터 조직폭력배 생활을 은퇴했고 개신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에 전념하게 된다. [[가족]]들의 회고에 따르면 말년에는 완전히 신앙에 귀의하여 영락교회 장로로 지냈으며, 2칸짜리 셋방에서 가난하지만 평온하게 생을 마쳤는데 그는 죽기 직전에 아들에게 아래 말을 남겼다고 한다. >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을 믿는것이 가장 중요하다. 오로지 [[예수|하나님의 사랑]]만이 진실하다.''' 그가 남긴 것이라고는 쓰러져가는 판잣집에서 빛바랜 [[사진]]첩과 손때 묻은 [[성경]]책이 전부였다고 한다. 이후 막내아들 이의현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한때 [[뒷세계]]에 몸담았다가 목사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