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두호 (문단 편집) == 생애 == 1943년 7월 5일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 [[전의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영로]]도 이 마을 출신이다.]에서 태어났다.[[https://m.hankookilbo.com/News/Read/200407280036230550|#]] 8살 되던 1950년, 고향의 다산국민학교에 입학했으나 그 해 발발한 [[6.25 전쟁]]으로 가족들을 따라 [[대구시]]로 피난을 와야 했고, 피난지인 대구에서 [[대구남산초등학교|남산국민학교]]를 다니다가 [[대구복명초등학교|복명국민학교]]에 전학하여 졸업했다. 이어 [[오성중학교(대구)|오성중학교]]와 [[영남고등학교]]를 차례로 졸업했다. 남산국민학교 4학년 때, 교내 사생대회에서 1등을 했고 이를 계기로 미술선생을 만나게 되어 강습을 받았다. 오성중학교 때는 야간부에 다니면서 낮에는 남산국민학교 시절 미술선생이 차린 화실로 가 그림 공부를 했다. 몇몇 사생대회에 나가 상을 받다가 중학교 2학년 때 서울에서 출판사를 하고 있는 사람의 눈에 띄어 만화책을 내게 되었으며, 3학년 때는 [[매일신문]] 신춘만화 공모에 뽑히기도 했다. 이후 영남고등학교 야간부에 진학하여 미술 공부를 계속한 뒤 더 넓은 곳에서 화가로서의 꿈을 펴보겠다는 생각에 1964년, 서울에 있는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대학교 1학년 때는 집에서 등록금을 보내줘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으나, 2학년을 앞두고는 학비를 도저히 마련할 길이 없어 입대해 버렸다. 1968년 군 제대 후에도 당장 복학하기가 어려워 구두닦이와 행상 등으로 학비를 어렵게 마련했으나 복학 시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받아주지 않았고,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퇴를 택해야 했다.[[http://news.imaeil.com/Society/2006071707551268685|#]] [[http://news.hankooki.com/lpage/sports/200812/h2008120902403497630.htm|인터뷰]]에 의하면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다니다가 2학년 때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0823010015|중퇴]]했다고 한다. 한때 중퇴라고 안 밝히고 슬그머니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출신이라고 넘겼으나 2000년대 초반에 유명인사 학력위조가 연달아 밝혀지며 파장이 커지자 중퇴 사실을 밝혔다. 원래 [[만화가]]가 될 생각이 없었다. 화가가 되고 싶었으며 만화가라는 직업 자체를 환쟁이라고 낮잡아 봤다.[* 그만의 인식이 아니라 당시 사회 전반적 인식이다. 실은 일반인 인식은 화가, 디자이너까지 몽땅 딴따라(연예인)와 동급인 천한 환쟁이에 들어갔었다. 만화가는 그런 환장이들 사이에서도 지위가 더 낮았던 것.]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 일본 만화를 베껴 그리는 번안 만화가가 된다. 당시엔 저작권 개념도 전무했고, 외국 문화 상품이 거의 정식 수입되지 못하는 '문화쇄국주의'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작 만화를 그대로 복제해서 팔면 작품에서 드러나는 [[왜색]] 때문에 검열에 걸린다.[* 저작권은 아무 문제가 안 되었다. 당시 저작권법 내용이 미비한 데다 국제저작권협약(UCC) 및 베른협약 등에 가입 같은 것도 안 되어 있었기 때문. 요즘 중국을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배경이나 인물을 한국인으로 고쳐서 고대로 베껴 그린다.[* 그래서 왜색이 드러나지 않는 유럽 역사물이나 SF물 같은 것은 (일본 책은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넘기므로 제철이 반대라서) 원고를 뒤집고 대사 식자만 다시 해서 그대로 버젓이 연재, 출판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벨 2세]].] 물론 작화 수준은 일본 원작보다 훨씬 조악해진다.[* 다만 이두호는 그 점에서는 예외에 속했다. 그림 솜씨가 원작자 못지 않거나 더 잘 그릴 정도였으니. 덕분에 인기 작가가 된 것이기도 하다.] 본격적으로 만화가 생활을 시작한 것은 1969년 소년중앙에서 '투명인간'을 연재하면서부터였다. 꿈은 화가였지만 밥벌이의 일환으로 만화계에 입문한 상황이다 보니 상술했다시피 데뷔 초부터 스스로가 만화가라는 것을 탐탁치 않아했다고 한다. 게다가 만화가란 인식이 지금보다 훨씬 안좋았던 때라 자격지심이 매우 심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술자리에서 동창이 '너 요즘 돈 잘 번다면서?' 라고 하자 술김에 "그래, 나 만화 그린다, 어쩔래?" 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술자리의 친구들은 벙쪘다고. 1969년 [[소년중앙]]이 나오면서 일거리가 늘었다. 당시 유명 소설이나 영화를 만화화 하거나, 상술했듯이 일본 만화를 수입해서 그걸 현지화(표절?) 시키는 게 유행했는데 이두호는 일본 만화를 우리식으로 번안하여 그리는 능력이 뛰어났던지라 만화출판사들이 '이두호만 있어도 만화 잡지 한 권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칭찬 아닌 칭찬... 그 만화 잡지 한 권이 데즈카 오사무처럼 순수창작이었다면 지금 '대가'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겠지만... ]. 이후 스스로 만화가라는 자각과 자부심도 없는데다가 화가라는 꿈을 버릴 수 없었던 상태에서 만화를 계속 그리는 것은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결국 70년대 말~80년대 초 같이 화실을 쓰던 동료작가 [[한희작]]에게 2년간 '대필'을 해줄 것은 부탁했다고 한다. 전면 대필은 아니고 스토리와 중요한 인물 얼굴은 이두호 본인이 하기는 했지만 사실 상 그 2년간은 '만화를 놓은' 시기였다. 그 2년여 간 소원대로 유화를 맘껏 그렸지만 전혀 성과가 없었고,[* 서울의 일류 미대를 버젓이 졸업해도 순수 미술로는 밥벌이를 못 하던 시절이다. 그나마 선후배 연줄로 그룹 전시회를 열고 일 년에 한두 점 팔까말까한 때였는데, 대학 졸업도 못한 그가 성공하기는 힘들었다.] 결국 생계를 위해서 다시 만화를 그린다. 여담으로, 그 2년 동안 자기가 그린 유화 작품 중에 거대한 캔버스에 가시철조망만 빼곡히 그린 걸 가장 자랑스러워한다고 전한다. 이곳저곳에서, 특히 후배 만화가들에게 은근 자랑스럽게 아직도 "그건 내가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다, 는 상징을 담은 그림이었다" 라고 설명하곤 한다고. 하지만 그정도 상징과 표현이라면 화가로 나서기에는 턱도 없는 역량이다. 이미 약간 앞선 시기의 [[피카소]], [[잭슨 폴락]], [[마르셀 뒤샹]] 같은 네임드의 표현 수준과 비교해볼 것도 없다. 웬만한 화가 습작생에게도 안 먹힐 자랑이다. 쉽게 말하면, 지도를 그리라니까 괴발새발 약도를 그리는 수준. 80년대 초반이면 백남준이 1984년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란 비디오아트 작품으로 세계최초 위성생방송과 인터랙티브 공연을 선보인 때다. 어줍잖은 사물 한두 가지 붓질해놓고 거창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시대는 지나간 셈.--유화 전공한 사람이 은퇴작을 추상화로 그려가지고 괜한 비판을 듣고 있다.--[* 반론 유행이나 시대 조류에 안맞느다고 해서 특정 사조가 완전히 가치를 잃진 않는다. 그저 안팔리는 경우가 생길 뿐. 당장 전국에 그림 전시하는 아무 갤러리에나 한번 들어가봐도 작가가 아예 추상(비구상) 쪽으로 파고드는 경우가 아닌 한 풍경화나 정물화 쯤은 있다. 일례로 로커빌리가 한물 간 음악 형식이라해서 락 타이거즈를 가수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게다가 비구상 쪽을 판다 해도 저 이두호보다 더 나을 것도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 그들은 화가가 아니란 말인가? 이건 뭐 미슐랭 식당 리뷰나 읽어본 스노브가 경양식집 사장한테 니들은 요리사도 아니다 이러는 것도 아니고...게다가 원론적으로 보자면 이두호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만화도 엄연한 예술이다. 비구상에 약한 면을 보였을 수는 있지만 이두호의 기본 데생 능력이나 필력은 미술대학 회화과 나온 전공자 수준보다 높으면 높았지 결코 낮지 않다. 홍대 미대 회화과는 그 때나 지금이나 국내 1위, 아무나 들어갈수 있는 데가 아니다. 물론 당시는 지금보다야 경쟁율이 낮긴 했으나, 입학한 것만으로도 실력 검증은 된 것.] 만화가로서의 자격지심과 화가로서의 자부심 때문에라도 성인물 같은 건 가급적 손을 대지 않으려고 했단다. 그러나, 성인대상 사극은 주간지에 연재한 게 많다.[* 70~80년대 주간지는 지금 보면 19금이 아니라 포르노물이라고 할 정도로 실린 소설, 만화 작품의 성적 묘사 수위가 높았다. 당시 박정희나 전두환 때 3S 덕을 본 것이다.] 다만 [[윤승운]][* 항목에도 나오듯이 성인물을 안 그렸다고 알려졌으나, 그도 성인 사극물을 그린 바 있다.] 같은 경우도 이렇게 알려졌지만 적어도 윤승운은 자부심이니 뭐니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다. 그의 역사 만화가 보여주는 특징으로는 시각 이미지의 총체성이다. 그는 역사적 사실을 작품에 재현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박물관이나 민속촌 등 자료로 삼을 만한 곳이 있으면 어디든지 현장 답사를 하는 한편 사진자료도 스크랩해 모아 역사적 고증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특히 사진촬영이 금지된 박물관에서는 스케치를 주로 했다. 이는 <객주>, <이두호의 한국사 수업> 등에서도 잘 드러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