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자왕/생애 (문단 편집) == 죽음과 사후 == 660년 9월 3일 의자왕은 왕후인 [[은고부인]]과 아들인 [[부여융]], [[부여효]], [[부여태]], 부여연, 대좌평 [[사택천복]] 이하 [[신하]] 및 장수 93명과 백성 12,00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어 수도인 [[시안시|장안]]에 이르렀다. 660년 11월 1일 장안에 도착한 의자왕은 부여융을 비롯한 [[왕자]] 13명, 대좌평 사택천복과 국변성 등 37명 등과 함께 조당에 나아가 [[고종(당)|당고종]]과 [[측천무후]]를 만났다. 당고종은 이들의 잘못을 크게 꾸짖은 후에 이들 모두를 사면하였다. 그 뒤 그는 [[나라]]를 잃고 나서 심한 충격을 받아 망국의 회한에 괴로워하며 며칠만에 머나먼 이역 땅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사실 아들 부여융이나 [[고구려]]의 동병상련 [[보장왕]]이 나라가 망한 뒤 어떻게 되는지를 보면 의자왕이 오래 살았다면 당나라가 부리는 괴뢰정권의 [[얼굴마담]]으로 이용당했을 가능성이 크므로 일찍 죽어버려서 더한 모욕을 피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죽은 의자왕과 그의 [[후손]]들은 [[뤄양시|낙양]] 북쪽의 [[북망산]]에 묻혔다.[* 그의 증손녀는 당나라 [[황족]]과 [[결혼]]했다.] 당고종은 의자왕이 죽자 '금자광록대부 위위경'을 추증하고 의자왕의 옛 신하들로 하여금 조상하게 했다. 《[[삼국지]]》에 나오는 [[오(삼국시대)|오나라]] 마지막 황제 [[손호]]와 [[남북조시대]] 남조 진나라의 마지막 황제 [[진숙보]]와 함께 묻혔는데 이 묘역에는 망국의 [[군주]]들만 모아서 매장했다. 이후 부여융이나 [[부여풍]]을 비롯한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의자왕의 후손들은 모두 영영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고[* 그의 아들 중 [[부여용]]이 있는데 664년 일본 난파(현 [[오사카]])로 건너가 살았다고 한다.[[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ns.k_0041_0040_0020_0010_0010|#]]] 부여융은 [[웅진도독부]] 도독이 되어 사실상 당나라의 [[꼭두각시]]로 동생 부여풍이 이끄는 부흥군을 토벌하는 등 형제끼리 싸우는 씁쓸한 결과를 맞는다. 일본 승려의 [[여행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따르면 셋째 왕자가 [[흑산도]]로 [[http://db.history.go.kr/id/ds_004r_0050_0080_0030|피난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삼국사기]]》보다 좀 더 당대에 가까운 전승인만큼 실제 백제판 [[마의태자]]일 수도 있겠지만 이것도 백제 [[멸망]] 후 약 200년이 지난 뒤 기록이기 때문에 [[통일신라]]에서 떠돌던 옛 전설일 수도 있다. [[충청남도]] [[부여군]] 백제 왕릉원([[능산리 고분군]])[* 백제 후기 군주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인근 정림사 터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1993년에 발견되었고 여러 정황으로 보아 왕릉군이 분명하다. 그러나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 멸망 이후 당나라 [[군대]]에게 [[도굴]]되고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번 도굴당해 현재는 남아 있는 [[유물]]이 매우 적기 때문에 묘들의 주인들을 알 수 없다. 제26대 [[성왕(백제)|성왕]]부터 제29대 [[법왕(백제)|법왕]] 때까지 [[왕]], [[왕비]], [[왕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성왕은 송산리 고분군에 묻혔다는 설도 있다. 백제 중기 왕들의 무덤인 [[공주시]]의 [[송산리 고분군]]은 제22대 [[문주왕]]부터 제25대 [[무령왕]] 때까지 무덤으로 보이는데 [[무령왕릉]]이 여기 있다.]에는 선조들의 무덤과 함께 의자왕과 그의 [[태자]] 부여융의 [[가묘]]도 있다. 능산리 고분군에서 서쪽 능산리 절터 쪽으로 가다 보면 도중에 있는데 다른 정식 [[왕릉]]보다 봉분 크기는 작고 [[비석]]에 '''백제국의자대왕단비(百濟國義慈大王壇碑)'''라고 써 있다. 이것은 원래 여기 있던 것이 아니라 현대에 새로 만든 무덤인데 부여군에서는 중국 뤄양시와 함께 1995년부터 북망산에 묻힌 의자왕의 무덤을 찾아 유해를 수습해 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북망산 일대는 의자왕릉뿐 아니라 지역 전체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는 도굴로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에 그의 무덤의 정확한 위치는 결국 찾을 수 없었다. 딱히 의자왕릉이라서 타겟이 되었다기보다는 중국은 [[동릉 도굴 사건]] 문서에서 볼 수 있듯 당장 관리 인력이 상주하던 [[청나라]] 황릉도 [[군벌]]이 [[폭탄]]을 동원해 도굴할 정도로 근대에 혼란이 극심했다.[* 의자왕 바로 옆에 묻혔다던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손호]]나 [[진나라]]의 군주 [[진숙보]]의 무덤에 도굴갱이 훤히 뚫렸으니 의자왕릉은 어떻게 되었을지는 뻔하다.] [[땅]]을 더 파면 찾을지도 몰랐지만 시간, 인력, 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결국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2000년 4월 영토 반혼제 의식을 올리고 그 곳의 [[흙]]을 퍼와 일단 부여군 [[부소산성]]에 있는 고란사에 봉안했다가 2000년 9월 이 곳에 가묘를 세웠다. 의자왕이 백제를 떠난 지 1340년 만에 선대 왕들과 나란히 같은 장소에 묻힌 것이다. 7세기 백제의 굴식돌방무덤 양식으로 묘를 조성하고 [[무령왕릉]] 지석을 참고해 백제의 [[장례]] 방식으로 묘지신에게 땅을 구입한다는 의미로 매지권과 의자왕의 품성과 일대기를 기록한 자체적으로 만든 지석을 관과 함께 매설하였다. 2008년 의자왕의 증손녀 '[[부여태비]]'의 묘지석이 발견되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2&aid=0002001270|#]] 2017년 중국 북망산에서 의자왕의 능묘로 추정되는 능묘 1기를 발견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http://www.d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0612|#]] 다만 과거 의자왕의 유해 [[귀국]]을 추진하다가 막대한 비용을 치른 일이 있어서 유해 귀국은 추진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의자왕, version=1304, paragraph=3)] [[분류:의자왕]][[분류:인물별/생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