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육모 (문단 편집) == 생애 ==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정의를 중시해 주위에 청빈한 친구들인 진융, 복양일, 장찬, 원적 등이 모여들어 육모와 교류하자 육모 또한 작은 물건이라도 나누어 주고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 했으며, 심지어는 그와 면식이 없는 같은 군 사람인 [[서원(삼국지)#s-1|서원]]이라는 자는 죽을 때 유서를 남겨 고아가 된 자신의 아이들을 돌봐주기를 부탁하자 육모는 그들을 맞이해 길렀다. 219년에 숙부 [[육적]]이 요절했을 때 고향으로 돌아가 있던 그의 아들 육굉, 육예과 딸 [[육울생]]도 모두 돌아오도록 해 육모가 길러 이들이 모두 성장하자 헤어졌다. 그런 그의 명성 덕분에 주와 군에서 그를 불러 천거했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으며, 당시 인물 품평에 탁월했던 [[글염]]이라는 자가 관리를 선발할 때 사람들의 단점을 공개하자 육모는 편지를 보내 [[공자]]의 사랑과 [[곽태#s-1]]의 구제를 본받으라고 말했지만 실행이 불가능한 말이라 실패한다. 232년에 [[손권]]이 직접 공적인 수레로 육모를 초빙하자 육모는 의랑, 선조상서가 되었으며, [[공손연]]이 손권의 사자를 목베고 위나라에 귀부한 일에 손권이 분노해 직접 정벌하려고 하자 상소를 올려 우리가 공손연을 공격하면 공손연이 위와 손을 잡을 것이며 또 바다를 건너 거기까지 가는 것이 불가능한 데다가 본진을 산월족이 뒤치기로 먹힐 수 있음을 들어 반대했다. 그래도 손권이 공격하려고 하자 다시 상소를 올려 지금 위와 산월의 문제가 바로 본진에 있는데, 그 먼 곳까지 군사를 보내는 것이 뭐하는 짓이냐라고 하자 그제서야 손권이 육모의 문장의 이치와 곧고 간절함을 칭찬해 원정 계획을 실시하지 않았다. 23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로는 [[육희]]가 있으며, 손자는 [[육엽]], [[육완]] 등이 있다. 삼국시대 이후 위진남북조시대에 활동했던 대다수의 오군 육씨들은 육모의 후손인 경우가 많다.[* 육손은 유일하게 후사를 남긴 아들 [[육항]]의 후손들이 전부 [[삼국통일]], [[팔왕의 난]] 때 죽어서 대가 끊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