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찬(전조) (문단 편집) === 한나라의 분열 === 석륵은 역적 근씨들이 가까이 있었던 자신에게 항복하지 않고 유요에게 항복하자 대노하여 6촌 동생인 [[석호(후조)|석호]]를 선봉으로 삼아 평양을 공격했다. 근명이 맞서 싸웠지만 패배하고 유요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유요는 유아에게 평양으로 가서 근명을 구원하게 했는데 근명은 유아의 호위를 받으며 근씨 일족들과 성 안의 백성 15,000여 명을 데리고 빠져 나왔다. 하지만 유요는 군대를 동원해 근명을 포함해 근씨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뒤이어 석륵은 평양을 불태운 후 철수했다. 유요와 석륵은 서로 군세가 만만치 않다고 여겨 화친했다. 유요는 수도를 폐허가 된 평양에서 관중의 장안으로 천도했다. 319년, 석륵은 유요가 황제에 오르자 왕수를 사자로 보내 축하했다. 유요 역시 아직은 석륵을 칠 때가 아니라고 여겨 이를 받아줬는데 조평탁이라는 자가 유요에게 왕수가 석륵이 보낸 첩자라고 말하는 바람에 유요는 왕수의 목을 베었다. 유요는 석륵을 태재에 임명하고 조왕(趙王)으로 봉할려고 했었는데 살아남은 왕수의 부관이 겨우 도망쳐 석륵에게 왕수의 죽음을 알렸다. 이에 석륵은 대노했다. 이후 유요는 나라 이름을 조(趙)로 바꿨으며, 석륵도 조왕에 즉위했는데 유요의 조를 '''전조''', 석륵의 조를 '''후조'''라고 부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