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재하 (문단 편집) == 평가 == 오늘날 '''한국형 발라드의 문을 연 선구자'''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다. 음악 평론가 [[임진모]]는 2008년 [[MBC FM4U]]의 '한국 대중음악, 시대를 걷다'에서 '대한민국의 [[발라드]]는 [[이영훈(음악가)|이영훈]]에 와서 문이 열리고, 유재하가 창작과 작곡, 편곡의 세계[* 실제로 [[사랑하기 때문에]]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사상 최초로 한 사람의 가수가 작사, 작곡, 편곡을 ‘혼자서’ 그것도 '훌륭하게' 완수해낸 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싱어송라이터]]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준 셈. 참고로 이영훈은 그의 페르소나로 가수 [[이문세]]가 있었다.]로 발라드의 지평을 올렸다'는 식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김영대(음악평론가)|김영대]] 평론가도 당시엔 잘 쓰지 않던 9th 코드 등 여러 [[화성학]]적 디테일을 발굴해내고 모던함을 연 모던 발라드의 선구자라고 평했다. 2021년 SBS에서 방송한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에서도 이영훈과 유재하를 [[발라드/한국|한국형 발라드]] 계보의 시초라 평가하면서, 특히 유재하는 발라드에 팝적 요소를 가미하고, 단조 대신 장조 코드를 유행시키고, 브릿지 부분을 도입한 것을 높게 평가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ozs0eViyB0|영상]]. 대한민국 대중음악사가 '''유재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까지 나오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그의 '''음악적 시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드물었던 대중음악하는 음대 [[작곡과]] 출신답게 그의 음악은 세련된 오케스트라 선율이 들어가는 등 기존의 대중음악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줬는데, 쉽게 말해 기존 대중가요가 일률적으로 가졌던 소위 '''뽕끼가 그의 음악에서는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같은 곡이라 하더라도 한세대 위의 가수인 [[조용필]]이 부른 '사랑하기 때문에'는 뽕끼가 상당히 느껴진다. 편곡이나 창법 차이도 있었던 것. 그래서 유재하가 더 평가받는 것이기도 하고.] 그의 노래 대부분이 다소 슬프고 애잔한 느낌을 주지만 이전의 가요처럼 [[신파]]조는 아니다. 오히려 슬프지만 무언가 깔끔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한국 가요 발라드계의 양대 원조격인 [[이영훈(음악가)|이영훈]]의 음악들조차 사실 저 '뽕끼' 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했던걸 고려하면[* 물론 뽕끼 자체가 무조건 단점이라고 볼 순 없다. 다만 팝송이 주류이던 시대적 흐름에서 정반합하지 못하고 구시대적으로 느껴진건 사실이다.] 유재하가 얼마나 앞선 감각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즉, 당대 한국 가요계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장르를 20대 중반의 나이에 '''개척'''했고 이게 '''주류'''가 되었다는 점이 그가 오늘날 와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이다. 단순하게 봐도 조용필이라는 대가수가 지배하던 당시 가요 지평에 그 조용필조차 뛰어넘으려고 시도했지만[* 조용필 역시 당대 팝송의 영향을 받아 부단하게 한국형 가요의 새 길을 찾으려고 노력한 뮤지션이긴 했다.] 결국 완벽히 성공하진 못한 대중적 장르 깨기를 1980년대 후반 이후부터 주류가 된 가요(팝) 발라드로 성공시킨[* 다만 본인은 딱히 이것을 [[발라드]]라고 지칭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엔 발라드라는 말이 대중화되기 시작하는 80년대 후반 직전이라 어찌보면 당연할지도. 2017년 유재하 형의 인터뷰에 따르면 "제가 재하에게 '장르가 뭐야?'라고 물으니 '[[음악]]에 [[장르]]가 어딨어. 뭐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크로스오버]]랄까'라고 하더군요. '그런 장르도 있니?'라고 하자 ''''나 같은 장르' '''라며 웃었어요. 음악적인 자존심이 무척 강했죠."라고 한다.[[https://www.yna.co.kr/view/AKR20170202195200005|#]]], 두 시초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다는 것에 대단한 점이 있다. 알다시피 한국형 발라드는 지금도 (물론 꾸준한 변화와 발전, 락발라드 등 장르적 혼합도 있어왔지만) 힙합, 댄스 아이돌 음악 등과 함께 대중음악의 주류 장르다. 물론 이들이 무슨 대형 기획사를 세웠다거나 후배 뮤지션들을 직접 기른건 아니라[* 후술되어있듯 [[유재하 음악경연대회]]가 있긴 하지만, 이건 사후 유족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대회라 생전 직접적인 연관은 없긴 하다.] 오늘날 대형 기획사만큼의 꾸준한 영향력을 가지진 못했지만, 예술적 영감을 줬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이 결코 작진 않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도 후배 가수들, 특히 90년대 [[발라드]] 가수나 작사, 작곡가 등 종사자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끼친 영향 역시 상당했다.[* 오늘날에도 유재하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증언하는 후배 뮤지션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재미있는건 R&B 쪽에서도 이런 반응이 제법 있다는 것인데, 유재하가 멘토라는 [[정엽]]이나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 유재하 1집이라는 [[태양(BIGBANG)|태양]], 유재하를 가장 존경한다는 [[베이빌론]] 등이 대표적이다.] * [[신승훈]]은 유재하 노래를 너무 좋아해서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일부러 [[11월 1일]]을 자신의 데뷔일로 잡았다. * [[김광진(가수)|김광진]]은 1991년 발표한 자신의 첫 독집에 “너를 위로할 수가 없어”를 유재하에게 헌정했고 1998년 두번째 독집에 다시 리메이크[[https://youtu.be/PvxzM6ImqOE|#]]하여 싣기도 했다. 또 “내 마음 속에 비친 내 모습”을 1997년 유재하 10주기 추모 앨범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에서 [[더 클래식]] 멤버이자 피아니스트/키보디스트인 [[박용준]]의 편곡으로 부르기도 했다. * [[김동률]]은 유재하의 죽음으로 한국 발라드 계열의 음악은 100년은 퇴보되었다고 말했다. * [[이규호(가수)|이규호]]는 자신의 하나음악을 통해 1999년 발표한 첫 독집 음반에 유재하를 기리는 마음을 담은 자작곡, “영원한 길”을 수록하였다. [[https://youtu.be/gWgYNos875M|#]] * [[이적(가수)|이적]]은 작곡, 작사, 음악을 대하는 자세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가수 중 하나가 유재하라고 한다. * [[유영석]]은 유재하에 대해서 놀라움, 질투, 존경을 한 번에 느낀다고 한다. * [[유희열]]이 클래식 음대를 진학하게 된 계기가 유재하라고 한다. * [[정재형]]도 한양대 작곡과에 진학한게 유재하 때문이라고 밝혔다. * [[윤종신]]은 [[라디오 스타(황금어장)|라디오 스타]]에서 '이 사람의 노래를 듣고 음악을 하겠다고 마음 먹었고 마음 속의 [[라이벌]]로서 그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특히나 [[작사]]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는 이야기를 하였다. * [[이상은(가수)|이상은]]도 유재하 노래를 상당히 좋아해서 특히 라디오 방송 같은데서 '사랑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등을 자주 부르곤 했다. [[이문세]]가 내 노래중에 어떤 곡을 제일 좋아하냐고 이상은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대와 영원히(유재하 곡)'라고 답했었다. * 한양대 작곡과 후배이자 유명 대중음악 작곡가인[* 이런 점에선 유재하의 간접적인 후계자라고 볼 수도 있다. 김형석은 훗날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704150426916679|인터뷰]]에서, 실제 대학 시절 만난건 2~3번 정도에 대선배라 그때도 음악 얘기만 나눴지 개인적으로 친해지진 못했다고 매우 아쉽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2023년 [[https://www.youtube.com/watch?v=XhRZqxqzodU|영상]]에서도 유재하를 멘토라고 표현하며 여전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김형석]]도 유재하 1집을 듣고 감명을 받아 클래식 음악에서 대중음악으로 진로를 바꿨다고 한다. 다만 요절해서 상대적으로 음악적 성과가 적기 때문에, 일각에선 [[소포모어 징크스|1집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뒤에 기량이 떨어진 가수들과 비교하며]], 이른 나이에 사망한 아쉬움이 더해진 약간의 과대평가를 받고 있다는 평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 활동 이전부터 [[조용필]], [[김현식]] 등 거장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본인도 1집에 아쉬움이 있다고 2집 준비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던걸 보면, 그런 그가 겨우 1집밖에 내지 못한 채 사고로 세상을 떠난게 당연히 아쉬울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빨리 떠났기에, 몇몇 안티들이 이영훈 등에게 간혹 제기하는 표절 논란에서 자유롭다는 장점도 있다. 한편, 가창력은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 편인데, 오죽하면 당시 유재하가 음정 불안 등의 이유로 가창력 미달(...)이라고 방송 출연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당시 방송사의 [[병크]]라고 볼 수 있는데, 유재하가 무슨 고음을 탄탄하게 내는 그런 스타일의 가수는 아니었지만, 그 특유의 순수하고 담백한 음색은 오늘날까지도 독창적이라고 호평받으며, 그렇기에 그의 곡들은 가창력이 아무리 좋더라도 쉽게 따라부르긴 어렵다는 평을 받는다. 애초에 형이 밝혔듯 유재하의 [[꿈]]은 [[가수]]보단 [[프로듀서]]였고, 특히 늘 같이 묶이는 가수가 유재하처럼 젊은 시절에 요절한 동시에 가창력으로 호평을 받는 [[김현식]]과 [[김광석]], 그리고 [[신해철]]이라 좀 더 대비되는 면이 없지않아 있다.[* 유재하가 워낙 일찍 요절한 탓에 유재하가 이들 중 제일 어릴 것이라 사람들이 많이 오해하는데 사실 김현식과는 고작 4살밖에 차이가 안 나고 김광석보다 2살, 신해철보다 6살 더 많으며, 이는 유재하가 이들 중 유일하게 20대라는 비정상적으로 어린 나이에 사망했기에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다만 넷 모두 사인은 다른데 유재하는 교통사고, 김현식은 병사, 김광석은 자살, 신해철은 의료사고로 생을 마감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