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선(삼국지) (문단 편집) === [[촉한멸망전|촉한의 멸망]] === 262년에도 강유가 북벌을 시도했다가 등애에게 격파되어 답중에 주둔했는데, 263년에 위나라 군대가 촉한으로 대규모 공세를 시작하고 강유는 "장익과 요화를 보내어 양안 관구와 음평 교두를 나뉘어 지키게 하여 미연에 방비해야 합니다."라는 표문을 보내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유선은 이미 강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이후였고, 점괘[* 점괘는 주로 군주들이 자신에게 적당한 논리가 없으나 신하의 반박을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해야 할 때 핑계로 쓰였다.]를 핑계로 강유의 요청을 무시한다. 대사령을 내렸다. 연호를 염흥(炎興)으로 고쳤다. 결국 강유의 우려대로 [[등애]]가 음평 방면으로 우회하여 촉한 내지로 직접 공격해왔다. 이 때 유선은 강유관으로 적이 올 수 있다는 판단으로 [[제갈첨]]을 파견했으나,제갈첨이 주저하는 사이 [[등애]]는 강유관의 [[마막]]을 격파하고 험지를 벗어나 평야 지대로 진출했다. 이후 제갈첨군은 요충지를 상실한 채로 등애와 맞붙어야 했고, 면죽에서 [[제갈첨]], [[황숭]] 등이 전사하며 성도는 등애에게 직접적으로 노출된다.[* 제갈첨의 관직이 어림군을 총괄하는 위장군이었고, 촉한군의 대부분은 강유가 통솔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성도에는 말그대로 최소한의 수비대만 남아있었을 것이다. [[끔살|이 때 등애가 공격해온다면...]]] 한편 촉한의 조정에서는 등애가 이미 평지로 들어왔다는 소식[*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정사 삼국지 초주전에서 등애가 음평(陰平)에 들어올 때부터 백성들이 동요한 것은 후대에 잘못 쓰여진 것으로 음평에서 '음(陰)'자를 빼서 등애군이 '평지(平)'에 들어오자 백성들이 동요한 것이라 적어야 한다.]을 듣고 유선이 신하들을 모아 상의했지만, 누구도 좋은 계책을 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촉은 본래 오와 동맹국이었으므로 오나라로 도주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어떤 사람은 남중(南中, 익주(益州)의 남부 지역)의 일곱 군이 험준하고 두절되어 있어 스스로 방어하기 쉬우므로 남쪽으로 도망 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그러나 남중은 [[맹획|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당한 지 30년이 조금 넘은데다 제갈량이 북벌을 위해 지속적으로 물자를 징발하는 등 촉한 조정에 반감이 깊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남중으로 피신하든 말든 등애 앞에 끌려오긴 마찬가지다. 원 역사대로 사지 멀쩡하게 등애 앞에 꿇어앉을 지, [[오란(삼국지)|머리만 등애 발밑에 덩그러니 놓여있을 지]] 차이일 뿐...] 이때 [[초주]]는 직책이 광록훈 아래 자문에만 응하는 광록대부였는데 조정에서 오로지 혼자 항복론을 주장했다. 남쪽으로 가봐야 반란뿐이고 오나라에 의지해봐야 나중에 오나라가 망하면 두 번 항복하는 꼴이 된다며 그냥 요약하면 '걍 깔끔하게 여기서 항복합시다'라고 주장한 것인데 위나라는 항복을 받지 않을 거라는 비난도 초주가 다시 동오가 항복하지 않았으니 촉을 대우해 줄 것이라고 반박해 초주의 이치를 당해낼 자가 없었다. 당시 촉한 조정에는 [[유심]]과 같은 극소수의 사례를 제외하면 진지하게 항전하려는 이가 없었다. 그나마 위나라에 [[항복]]하자는 이가 없었던 것은 그 동안 했던 짓[* [[한중 공방전]], [[제갈량의 북벌]], [[강유]]] 때문에라도 항복해도 살려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남중이나 오나라[* 말이 좋아서 피신이지 사실상 항복하자는 거다...]로 피신하자는 의견이 조정에 지배적이었던 것. 상황이 이렇다 돌아가다 보니 촉한의 대신들이 조정에서 남쪽으로 피신할 것을 주장한 건 일리가 있었다. 이때 유선이 항복하자는 [[초주]]의 말을 듣고 남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결정짓지 못하며 주저했으나 조정의 어떤 이들은 '폐하께서 위나라 군대가 깊숙이 침입하도록 하기 위해 남쪽으로 갈 계획을 갖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 후 초주도 주로 남중으로 피난가려는 걸 반박한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촉한 조정의 의론은 남중으로 가려는 것으로 흐르고 있었던 듯하다. 또 이 기록은 초주의 말을 듣고 주저하고 있다고 해도 유선 역시 처음엔 남쪽으로 들어갈 결정을 지을 생각이 있었다는 말도 된다. 이에 초주는 상소를 올려서 남중으로 가면 이민족을 소모시켜 심하면 반란의 위험이 있다는 주장에 덧붙여 여기에 일찍 항복하면 작위와 토지를 얻을 수 있고 만약 남쪽으로 가서 대세가 다하면 큰 화를 입을 것이며 성인은 운명을 알고 자기 견해를 고집하지 않는다고 유선를 제촉했다. 결국 유선은 등애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하였고, 유선의 다섯째 아들 북지왕 [[유심]]이 이에 반발해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다 자살하였지만 항복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유선은 '장강, 한수로 한정되고 나뉘어서 깊고 멀리 떨어지고, 촉 땅에 의지해 한쪽 구석에 두절되니, 천운을 범하며 점점 여러 해를 지나 마침내 수도와 만리나 떨어지게 되었다. 부덕(否德)하고 암약(暗弱)한 나는 선대의 유업을 탐하여 여러 해 동안 그럭저럭 처신하며 큰 가르침[* 유선이 쓴 항복문서에 따르면 황초(220~226) 연간에 조비가 [[선우보]]에 명해 조서를 전해 3가지 좋은 은덕을 배풀었고 대의가 분명했다 한다.]을 따르지 않았다며 왕의 군대가 가는 곳마다 신무하니 어찌 순종하지 않겠느냐면서 즉시 장수들에게 명해 [[과(무기)|과]]를 내던지고 갑옷을 벗도록 하고, 관부에 저장된 물건은 조금도 훼손하지 않도록 하였다. 백성들은 들에 퍼져있고 여분의 식량과 남은 곡식이 밭이랑에 쌓여 있으니 훗날 은혜를 입어 백성의 목숨이 보전되길 기다리며 하명을 청하며 성심을 고하고 충성과 정성을 공경히 바치니, 존망과 임금의 하사가 모두 그대에게 달려있어 수레에 실어놓은 관를 가까이 두고 더 이상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라고 등애에게 항복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집필한 사람이 바로 [[극정]]이다.] [[장소(촉한)|장소]], [[등량]]은 낙현(雒縣)에서 등애와 만났다. 등애는 서신을 받아보고 크게 기뻐하며 이내 답장을 썼다. 유선은 또한 태상 [[장준]], 익주별가 여초(汝超)를 보내 절도(節度)를 받게 하고, 태복 [[장현(삼국지)|장현]]을 보내 강유에게 (항복) 칙명을 전했다. 등애는 장소, 등량을 먼저 돌려보냈다. 또한 상서랑 이호(李虎)를 보내 사민부(士民簿)를 전하니, 영호(領戶,거느린 민호) 28만, 남녀구(男女口) 94만, 대갑장사(帶甲將士,무장병) 10만 2천, 관원 4만 명, 쌀 40여만 곡(斛), 금은 각 2천 근(斤), 금기채견(錦綺綵絹) 각 20만 필이었으며 나머지 물건들은 이에 상응했다. 그리곤 등애가 (성도) 성 북쪽에 도착하자 스스로 몸을 묶고 관을 등에 맨 모습으로 위군 등애의 진영을 찾아가 항복하였다. 등애는 결박된 것을 풀고 관을 불태우고 유선을 청하여 맞아들여 서로 만났다. 황제의 권한을 편의로 행사하여 유선을 표기장군으로 삼았다. 수비군들은 모두 유선의 칙서를 받은 연후에 항복했다. 등애는 유선을 옛 궁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그곳으로 가서 만났고, 물자는 엄정히 해두고 쓰지 않았다. 진제공찬(晉諸公贊)에 따르면 유선은 노새가 끄는 수레(騾車)를 타고 등애에게 나아가니 망국(亡國)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 264년, 위군의 내분을 틈타 [[강유]]는 유선에게 촉한 재흥의 밀서를 전달했다. 하지만 강유의 반란은 실패하고 강유와 많은 신하들, 그리고 태자 유선을 잃었다. 유선는 살아남은 가족들과 함께 [[낙양]]으로 이송되었고, 그를 따르는 신하는 [[극정]] 등 몇몇에 불과하였다. 유선의 후궁 [[이소의]]가 자결했다. 서진에서 받은 시호는 사공(思公)이지만 기록에 따라서 혜공(惠公)으로 되어있다. 이후 전조의 유연에 의해 다시 효회황제의 시호를 받는다. 오의 [[말제]] 등과 함께 낙양 [[북망산]]에 묻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