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금필 (문단 편집) == 기타 == * 유검필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흔히 유금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한자]]를 음독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黔]]이라는 한자가 '''‘검을 검’''', '''‘귀신이름 금’'''이라는 2가지 음으로 읽히기 때문이며[* [[인천광역시]] [[검단신도시]]의 검 자가 같은 한자를 쓴다.] 오늘날에는 유금필이라는 명칭이 유명하지만 조야기문(朝野記聞) 같은 [[조선시대]] 사료에서는 유검필이라 표기되어 있다. 명칭이라는 것이 시간에 따라 변하기도 하기에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으며 당대 기준을 중시한다면 유검필, 현대 기준을 중시한다면 유금필로 읽으면 된다. * [[전쟁]]사 중심으로 후삼국시대를 서술할 경우 챕터 하나를 유금필이 독차지할 수 있을 정도로 전공이 말 그대로 미친 수준이다.[* 신성재, 2018, 《후삼국 통일 전쟁사 연구》, 혜안.] 비교적 빈약하게나마 전해져 오는 [[후삼국시대]]의 기록들만으로도 엄청난 전과를 올린 것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 [[말갈|말갈족]]의 [[기병]]들을 활용한 능숙한 기병대 지휘는 물론 [[수군]]까지 잘 다루며 일생 동안 패배를 모르는 장수로서 일선에서 맹활약했다. 북번의 [[여진족]]을 제압하여 복속시키는데 성공했고 급기야 그들에게 '''대추장'''이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고 하니 통솔력 또한 [[군대]]를 이끄는 무장답게 출중했던 듯 싶다. * 의외로 개국공신으로서의 등급은 낮아서 1, 2등 [[공신]] 목록에도 유금필의 이름은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고 1번에 2,000여 명을 임명한 3등 공신일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918년 [[태조(고려)|왕건]] 즉위와 920년 골암진 파견 이전까지의 기록이 없다면 [[궁예]]의 위사 출신인 [[박술희]]처럼 무명의 장수를 파격적으로 중용했다고 추정해 볼 수도 있겠으나 왕건이 궁예를 몰아낸 직후인 918년 7월에 1등공신 [[홍유]]와 함께 궁예 친위 세력이 잔존해 있던 [[충청북도]] [[진천군|진천]]으로 파견된 기록이 남아있다. 1등공신인 홍유를 보좌해 내려갈 위치라면 왕건 즉위 시점에 무명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다른 기록이 없으니 추정만 해볼 수 있을 뿐인데 무명은 있었으나 비밀스럽게 진행된 왕건의 [[역성혁명]]에는 기여한 바가 적어 자연스럽게 뒤로 밀렸을 가능성이 크고 되려 왕건이 직접 [[정치]]적으로 안배를 해준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본래 이런 공신들을 책봉하는 건은 사건 이후의 혼란 및 터져나올 수 있는 반감을 수습하고 지지 기반을 얻기 위해 특별히 한 일도 없는 사람을 공신으로 책봉하여 우대해주거나 반대로 크게 공을 세운 인물을 일부러 낮은 등급에 책봉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공신 등급과는 별개로 유금필의 딸은 태조의 9번째 비인 [[고려의 궁원|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이 되었고, 유금필 사후에는 태조의 [[배향공신]]에 오르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 태조는 죽기 전에 따로 유언을 남겨서 “유금필의 자손이 [[죄]]를 짓더라도 따지지 말고 중용하라.”고 이를 정도였으니 그만큼 태조가 엄청나게 믿고 의지한 장수였음은 틀림없는 팩트라고 할 수 있다. 태조의 유언 덕분에 [[문종(고려)|문종]] 때 유금필의 [[후손]]인 유공의가 아첨이 심하고 많은 [[불법]] 행위를 저질렀음에도 죄를 묻지 않고 숙주방어사에 제수했다. 유금필의 또다른 후손인 유중경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삼촌과 조카 관계였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벼슬]]을 주는 것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금필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벼슬을 받았을 정도니[*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90761]] 참조.] 그의 후손들은 조상 잘 둔 덕에 호의호식했다. 현존 [[개성 왕씨]] 90%를 차지하는 동양군파는《[[고려사]]》에 등장하는 [[효은태자]][* 다만 태조와 동양원부인의 아들인 효은태자는 [[광종(고려)|광종]] 대에 [[역모]]에 연루되어 사사된다.]를 파조(派祖)로 삼고 있는데[* 정확히는 효은태자의 후손으로 [[조선]] 초기의 왕씨 [[숙청]]에서 살아남은 [[왕미(조선)|왕미]](王亹).] 효은태자의 생모가 바로 유금필의 딸인 동양원부인 유씨로[* 고려 초기 [[왕자]]들 호칭의 경우 생모의 출신지나 태어난 거처의 호칭을 따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태조의 제11비 천안부원부인 임씨 소생의 왕자는 천안부원낭군(천안낭군)으로 불렸다던가 하는 식.] 지금 남아있는 개성 왕씨는 모계 쪽으로 유금필의 핏줄을 잇고 있는 셈. * 사후 가림현[*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성흥면]의 성황신으로 모셔졌고 가림성이라 불렸던 부여 성흥산성 안에 유금필의 사당이 세워졌다. 사당을 관리하는 무속인이 1명 있기는 하지만 사당 자체는 유금필의 후손을 자처한 무송 유씨가 관리하고 있으며 사당에 모셔져 있던 [[나무]]를 깎아 만든 유금필 부부와 아들, 딸의 목상이 2008년쯤에 도난당한 것이 뒤늦게 알려졌는데, 목상의 행방은 지금까지도 묘연하다고 한다. [[http://www.21cbuyeo.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0|#]] * 유금필의 후손인 [[유방(고려)|유방]]은 [[제1차 여요전쟁]]에 낭장으로 참전해 중랑장 [[대도수]]와 함께 안융진 전투에서 [[소손녕]]의 [[요나라]]군을 격파하면서 항복론과 할지론으로 기울던 조정 중론을 강화론으로 뒤집는 공훈을 세워 과연 '유금필의 후손'답다는 평을 받았고, 이후 [[제2차 여요전쟁]]에도 참전했고, [[제3차 여요전쟁]]이후까지 생존했다. * 유금필의 또 다른 후손인 유자우(庾自㥥)[* 유금필 → ... → 유필 → 유자량 → 유경현 → 유홍 → 유해(경원군부인(慶原郡夫人)과 결혼했는데 작호로 보아 [[인천 이씨]]로 보인다.) → 유자우]의 묘지명이 현존한다. 유자우는 무송 유씨로 공숙공 유필의 5대손인데 스스로 유금필에게서 '계(系)'가 나왔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유금필의 관작은: * '''삼한통합제오호기위(三韓統合第五虎騎尉)''': 삼한통합은 후삼국 전쟁에 참여했다는 뜻일테고 제오호기위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호기위는 [[왕식렴]]도 가지고 있었는데 직위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 하다. 왕식렴은 그냥 호기위지만 유금필은 제5호기위이다. * '''태사(太師)''': [[천자]]의 스승으로 삼사 중 최고위 직. * '''개국공(開國公)''': 고려 개국공신에게 주어진 미칭. [[왕식렴]]도 가지고 있었다.《[[고려사]]》에는 개국공이라고 떨어져 있는게 아니라 '''개국충절공'''처럼 시호에 덧붙어 있다. * '''삼중대광(三重大匡)''': 1품 1등위 향직 품계로 가장 높은 향직 품계. * '''장위익대광위협보좌성저정공신(壯威翼戴匡衛協輔佐聖底定功臣)''':《고려사》에 등장하지 않는 저정공신호. * '''충절공(忠節公)''': 시호.《고려사》에도 등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