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담 (문단 편집) === 청주 통치 === 청주는 본디 전국시대 강대국 [[제나라]]의 영역이었고, 후한 시대에도 부유하고 강하다는 인식이 있던 지방이었으나 황건적의 발호와 청주자사 초화의 사망으로 역내 공권력이 완전히 붕괴되면서 황건적 군벌들과 해적 혹은 '호걸' 이라 자처하던 자경단 기반의 소군벌들이 난립하는 무법천지가 되어 있었다. 주인이 없었던 백성들이 원담을 열렬히 환영하며 추대했다는 구주춘추의 기록은 청주 여론이 전해와 공융이 자칭하던 청주자사의 직함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지만, 원담이 전해와 공융을 격파하며 청주 전역을 화려하게 장악했던 만큼 청주에 다시 질서를 가져와 주길 바라는 기대가 강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원담의 통치는 군사적 활약상과 달리 대단히 무능했고 문제가 많았다. 구주춘추에 따르면 원담은 천성이 방자하며 사치스럽고 호색한인 데다 농사일의 어려움을 모르고 달콤한 아첨만 좋아해 주위에는 소인배만이 들끓었다. 그 결과 1만 호가 넘는 현이 있어도 세금은 그 3할에도 미치지 못하고 심지어 호적에 오른 가구는 겨우 수백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현지의 호족들이 경쟁적으로 토지겸병을 벌여 호적에 올라가는 자영농을 몰락시키고 자신의 장원에 소작인으로 편입시키는데도 '흥청망청 놀기 좋아하며, 농사일의 어려움을 모르고 달콤한 아첨만 좋아하는' 원담은 호족들이 눈앞에서 아첨하며 적당히 비위만 맞춰주면 여기에 도취되어 문제의 심각성도 파악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갔다는 소리고 호족들은 원담을 손쉬운 [[호구(유행어)|호구]]로밖에 보지 않았다는 얘기다. 당연히 병역법도 엉망이라 제대로 된 현역 대상자들은 모두 현지 토호들이 먼저 자기 사병으로 뽑아가거나 뇌물로 병역을 기피하는 바람에 병사로 부적절한 인력이나마 겨우 징집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번엔 아예 군사를 풀어 짐승떼를 사냥하듯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징집했다고 한다. 군인들의 배경이 이러니 군기도 빠질대로 빠져 도적떼를 소탕하는 영이 내려져 군대가 나오자 군사들이 전야를 노략질했고, 따로 호족들의 제대로 된 군대를 소집해도 원담을 만만하게 본 호족들은 기일에 제때 맞춰서 오는 법이 없었다. 이는 군법에 따르면 중범죄에 해당하는 사항임에도 호족들은 그로 인해 원담에게 처벌받는 일이 없었고 아무 걱정없이 편안히 지냈다. 그래도 명사들을 공경하여 능력이 알려진 현사들을 널리 초빙했지만 이런 답이 없는 상황들을 보고 현자들은 원담에게 가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이 없는 건 아니라 [[왕수(삼국지)|왕수]]와 같은 유능한 인재들도 있긴 있었으나, 원담 본인의 용인술이 형편없어 소인배들을 신임했을 뿐 제대로 된 인재는 중용되지 못하고 그저 자리만 차지하는 신세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청주를 화려하게 정복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청주의 호족 세력에 지나치게 영합하고 일반 농민들의 민생을 신경쓰지 않았다.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보다는 호족들의 비위만 맞추는 정책을 거듭하다보니, 오히려 호족 세력에게 휘둘리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결국 청주의 민생은 물론 원담 자신이 지식인들의 신뢰를 잃고 행정력도 추락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하기전의 서술에 따르면 원담은 청주에 난립하던 황건적과 호걸들.. 즉 청주의 군소 군벌세력들을 포섭하는데 대단히 적극적이었는데, 원담의 부하들 중 [[곽조]]나 [[관승(삼국지)|관승]]은 아예 해적 출신이었으며, 장패전과 하후연전에서는 원담이 조조에게 패사할 즈음 원담의 근거지였던 평원과 인접한 제남과 낙안에서 황건적 무리들이 봉기해 관리들을 죽이다 하후연과 장패에게 토벌되는 기록이 나타나고, 장홍전에는 원담의 전임 청주자사였던 장홍이 훗날 원소와 틀어져서 원소의 공격을 받을때 동향인 진림에게 흑산적과 연합한 것을 비난당하자 장연은 조정에서 정식으로 관직이라도 받았지만 원소는 황건적 같은 잡배들과 야합하지 않았냐며 편지를 통해 응수한다. 이러한 정황들을 감안했을때 원담이 영합하기 위해 힘썼던 청주의 호족세력들이란 심지어 전통적인 사인층조차 아니었으며, 청주의 공권력을 붕괴시킨 뒤 눌러앉은 황건적계 군벌들이나 혹은 공권력 붕괴를 틈타 자경단을 기반으로 '호걸'을 자처하며 지역사회의 리더로 떠오른 신흥 군벌들이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은데, 무정부 상태에서 폭력에 기반해 지역사회 내 패왕으로 떠오른 깡패들의 입지를 그대로 인정하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정치에 끌어들이며 형님동생 하던 원담의 행보는 아버지인 원소보다는 차라리 숙부인 [[원술]]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