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울릉군/역사 (문단 편집) === 공도 정책의 시행 === [[조선]]은 [[왜구]]의 출몰에 맞서 섬의 주민을 모두 육지로 이주시키는 공도(空島) 정책을 시행한다. 이에 따라 1403년 조선 [[태종(조선)|태종]]은 강원도의 '''무릉도(武陵島)''' 거주민에게 모두 육지로 나오도록 명하였고, 이에 [[쓰시마]]에서는 무릉도에 사람을 보내어 다스리게 해달라고 ~~[[징징]]~~요청하였으나 조선 조정의 대답은 당연히 거절한다는 내용. 그럼에도 군역을 피해 무릉도에 들어가 산 사람들이 다수 남아 있었기에 태종은 [[탈세|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1416년 김인우를 안무사로 무릉도에 보냈지만, 무릉도 주민 86명 가운데 김인우를 따라온 것은 고작 3명에 불과했다. 이에 ~~열받은~~ 태종은 신하들에게 명하여 울릉도 주민을 끌어낼 것을 논의하게 했는데, 모두가 반대하는 가운데 [[황희(조선)|황희]]가 홀로 쇄출에 찬성하는 바람에 결국 진행되었다. 이게 1417년. 그 뒤로도 조선 조정에서는 무릉도에 관리를 파견하여 공도 상태를 유지하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지금의 독도로 추정되는 우산도(于山島)가 발견되어 일부 이름에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임진왜란 이후에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몰래 울릉도에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지만 [[일본인]]들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모두 정착하지 못했으며, 이러한 연장선에서 1614년에는 [[쓰시마]] 번주가, 1615년에는 일본 선박이 각기 '''이소타케시마(磯竹島)'''와 '''다케시마(竹島)''' 안내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하는 일도 있었다. * 당초 일본에서는 '''울릉도'''를 가리켜 '다케시마' 또는 '이소타케시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지금처럼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게 된 것은 1905년 [[시마네현 고시 제40호]]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라 명명하며 편입한 이후의 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