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공(동진) (문단 편집) === 초기 생애 === 왕공의 할아버지인 [[왕몽(동진)|왕몽]]은 [[애제(동진)|애제]]의 황후 왕목지의 아버지였다. 왕공의 아버지인 [[왕온(동진)|왕온]]은 [[효무제(동진)|효무제]]의 황후 [[왕법혜]]의 아버지였으며, 왕공은 왕법혜의 오빠였다. 왕공은 젊은 시절에 명성가 있었고 고상한 절조가 남보다 뛰어났으며, 재능과 집안이 높았다고 자부했고 재보의 명망이 있었다. [[왕침(동진)|왕침]]과 함께 유명했고 사이가 좋았으며, [[유담(동진)|유담]]을 흠모하였다. 명재상 [[사안(동진)|사안]]은 왕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왕공의 인품과 집안이라면 장래에 백구(伯舅)가 될 수 있을 것이다."[br](王恭人地可以爲將來伯舅) ''' 저작좌랑(佐著作郞)으로 기용되었으나 왕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벼슬을 하면서도 재상이 되지 못하니 재능과 뜻을 어찌 충분히 펼칠 수 있겠는가!"[br](仕宦不爲宰相, 才志何足以騁!) ''' 결국 왕공은 병을 핑계로 저작좌랑을 사양했고, 뒤에 비서승(秘書丞)이 되고 중서랑(中書郞)으로 전임되었으나 임명되기 직전에 왕온이 사망하여 부친상을 치렀다. 장례를 마친 뒤 이부랑(吏部郞)으로 제수되고 건위장군(建威將軍)을 역임하였다. 태원(太元) 연간에는 심가(沈嘉)를 대신하여 단양윤(丹陽尹)이 되었고 중서령(中書令)으로 옮겼으며, 태자첨사(太子詹事)를 겸임하였다. [[효무제(동진)|효무제]]는 왕공이 황후 왕법혜의 오라버니이기에 왕공을 더욱 공경하고 중시했다. 당시 진군(陳郡) 출신의 [[원열지]]가 효무제의 동생인 회계왕(會稽王) [[사마도자]]에게 아첨하자, 왕공은 이를 효무제에게 이야기하여 결국 원열지를 주벌했다. 또 한번은 마도자가 일찍이 조신들을 모으고 동부(東府)에서 술자리를 벌일 때 사안의 동생인 상서령(尙書令) [[사석]]이 술에 취해 민간의 노래를 부르자, 왕공은 정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단우(端右, 상서령)의 지위에 있으면서 제후왕들을 불러모아놓고 방자하게 음탕한 소리를 지르니 어찌 조정 대신들이 본받도록 하겠습니까![br](居端右之重, 集籓王之第, 而肆淫聲, 欲令群下何所取則!)" ''' 왕공의 질책을 들은 사석은 왕공을 매우 원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