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기(삼국지) (문단 편집) == [[삼국지(정사)|정사]] == [[영제(후한)|영제]] 때 시중을 지냈고 영제가 하루는 양기에게 "짐과 [[환제(후한)|환제]]를 비교하면 그 우열은 어떠한가?"라는 질문을 했다. 이 때 양기는 아첨을 하지 않았기에 영제는 불쾌해하면서 "역시 [[양진]]의 후손이다."라고 하며 여남 태수로 [[좌천|전출시켰다.]] 영제 사후 [[동탁]]이 집권하고 [[헌제]]가 즉위하자 중앙으로 복귀해 시중, 위위에 임명되었고 동탁이 장안으로 강제 천도하자 수행했으며, 동탁이 죽고 195년에 헌제가 [[이각]]에게 끌려가자 헌제를 비롯한 백관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에 헌제는 양기를 시켜 이각에게 쌀 5섬과 소뼈 다섯 짝을 요청했지만 일부러 이각은 썩은 쌀과 썩은 소뼈를 보내 야유했으며, 헌제가 분노해 힐책하려고 하자 이각이 하는 행위에 대해 참으면서 그의 분노를 사 죄를 더욱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하기를 상주했다. 양기는 [[종요]]와 함께 이각의 부장 송엽(宋曄)과 양앙(楊昂)을 배반시키는 것에 공적이 있었고 이각과 곽사의 내분으로 헌제가 이각에 잡혀있다 [[장제(삼국지)|장제]]가 개입하면서 헌제를 모시고 이각의 진영에서 나오면서 도중에 곽사의 군대에 포위되었지만 동료였던 시중 [[유애]](劉艾)와 함께 수레의 휘장을 높게 들었고 헌제는 곽사군을 향해 지존을 감히 침범하냐고 해서 곽사군을 일시적으로 물러나게 했다. 이후 양기의 행적은 알 수 없지만 헌제가 [[조조]]의 비호를 받아 허창으로 천도하자 헌제는 양기의 공적을 인정해 그의 아들 양량(楊亮)을 양성정후(陽成亭侯)에 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