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제리/역사 (문단 편집) == [[근대]] == ||[[파일:알제 궁전.jpg|width=540]]||[[파일:오랑 베이 궁전.jpg|width=400]]|| || [[알제]]의 17세기 카스바 궁전 || [[오랑]]의 18세기 베이 궁전 || [[파일:알제리 역사.png]] 18세기 알제리의 정치 구도. 초록색은 알제 기반의 오스만 총독령, 그 외에는 총독에게 복속한 여러 술탄국들. 서쪽의 오랑은 당시 스페인령 1830년대부터 프랑스가 지중해 해안 일대의 바르바리 해적 토벌을 명분으로 알제리를 공격, 점령하면서 [[프랑스령 알제리]]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식민제국]]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지중해 해안 일대에서 출발한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은 식민 지배 기간 내내 계속되어 내륙의 사하라 사막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모로코 왕국이나, 베르베르인, 투아레그인 등의 내륙의 유목민들과 싸워가면서 1936년에 이르러서야 현재의 국경으로 확정된다. 프랑스군이 알제리에 처음 진주했을 당시에는 알제리인 식자율이 프랑스 군인 평균 식자율보다 높았다고 한다. 이는 프랑스군에게 최초로 공략당한 지역이 알제리 해안 도회지였기 때문. 알제리는 순순히 프랑스에 정복되지는 않았다. 서부의 수피 종교 지도자 [[압델카데르]]는 경기병 중심의 게릴라 전술로 프랑스에 무력 투쟁하였고, 여러 차례 놀라운 승리를 거두며 에미르로 추대되었다. 프랑스 역시 단번에 넓은 영토를 점령하지 못한 채로 해안 일대만을 영위하는 조건 하에 그와 휴전을 체결하였고, 압델카데르는 프랑스가 대대적으로 침공하는 1840년대 전까지 10여년간 알제리 최초의 근대 국가를 수립하였다. 그의 마스카라 토후국 혹은 압델카데르 에미르국은 비록 15년만에 항복하며 멸망했지만 한세기 이후 알제리 독립 운동에 있어 정신적 구심점으로 작용하였다. 압델카데르 역시 관용과 기사도 정신으로 인해 (과거의 [[살라흐 앗 딘]]처럼) 적이었음에도 프랑스 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후일 시리아 망명 도중 드루즈 폭동 당시 기독교도들을 보호해 준 덕에 레종 되네르 훈장을 받는 등 서구 세계에서 의인으로 인정받았다. ||[[파일:알제리 전투.jpg|width=550]]||[[파일:수카하라스 알제리 2.jpg|width=445]]|| || 1837년 프랑스 군의 [[콩스탕틴]] 함락 || [[수카하라스]]의 프랑스식 건물 || [[파일:마스카라국.png]] 1837년경 [[압델카데르]]의 마스카라 토후국의 영토 식민통치를 하면서 알제리 북부 해안지대가 프랑스 남부 해안지대와 유사한 자연환경을 가졌음을 파악한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를 제2의 프랑스로 만들어 영구 지배하겠다는 계획으로 강력한 프랑스화 정책을 추진했다. 알제리 내륙이 건조하고 척박한 것과 다르게 해안지대는 겨울에 춥지도 않으면서 여름에는 지나치게 덥지도 않고 비가 적당히 와서 토질이 비옥했다. 그래서 다른 프랑스의 식민지와 달리 알제리만큼은 프랑스 본토의 일부로 취급되었고, 실제로 프랑스 본토의 행정구역과 동일한 데파르트망을 설치하여 데파르트망 지사가 파견되어 알제리 지역을 관할하였다. 1877년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 서부의 오랑에서부터 동부의 콩스탕틴에 이르는 거의 전 지역에서 최악의 기근이 발생했고, 가뭄과 굶주림이 188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알제리 내륙의 농촌 경제는 몰락했지만 북아프리카의 가축 교역을 장악한 마르세유의 자본가들에게는 횡재로 작용했다. 가뭄으로 물과 초지가 사라지면서 가축들이 전멸할 위기에 처하자 내륙 지역의 농민들은 거래상들에게 가축을 헐값에 팔아야만 했다. 양 수출이 두 배로 증가하는 사이에 밀과 보리의 수출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1874년부터 1876년까지 3년동안 알제리에서 소 17,996마리가 수출되었으나 1877년부터 1879년 사이에 143,198마리의 소가 수출되었다. 알제리인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던 가축을 처분하였고, 내륙 지방 농민 상당수는 도시로 이주하여 유럽인, 유대인들과 격리된 장소에서 빈민 노동자로 일했다. 이 당시 프랑스 정부의 프랑스화에 발맞춰 수많은 유럽인들이 알제리에서의 새로운 기회를 찾아 대거 알제리로 이주했는데 식민 통치가 끝날 무렵인 1950년대 말 이들 유럽계 이주민들의 수는 알제리 인구 1000만 명중 100만 명 넘게 차지했을 정도였다. 중세부터 알제리에 거주하던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잽싸게 프랑스 식민통치의 부역자가 되었다.[* 알제리가 독립하자 알제리 독립 정부는 세파르딤(+피에 누아르)를 대부분 쫓아냈다. 오늘날 프랑스 유대인 상당수가 세파르딤 유대인인데 이들 과반수가 바로 알제리 출신으로 알제리 독립 당시 프랑스로 온 이들이다.] 알제나 오랑 등의 알제리의 주요 도시들은 유럽쪽 도시 분위기가 짙게 나타나는데, 이 당시 이주해온 유럽인들이 이 도시들에 정착하면서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은 검은 발이라는 뜻의 [[피에 누아르]](Pied-Noir)라 불리며 식민 지배 시기 알제리 사회에서의 기득권을 독차지했다. 프랑스 극우 진영과 이에 영향을 받은 미국 일부 우파 역사가들은, 프랑스가 알제리가 근대화시켰다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프랑스의 인프라 투자는 피에 누아르들이 대거 정착한 식민도시 위주로 진행되었으며, 정작 알제리 현지인들은 비옥한 해안가의 옥토들을 빼앗기고 추방당한 뒤 내륙의 척박한 토지를 경작해야 했다. 피에 누아르들의 소득이 계속 증가하는 것과는 반대로 알제리 현지인들의 소득은 인구 증가와 더불어 계속 감소하였으며, 피에 누아르들에게만 평등 교육이 진행되고 무슬림들을 일부러 학교 교육에서 철저히 배제하는 우경화 정책이 시행되었다. 후에 알제리 독립 이후에는 중학교만 졸업해도 엘리트 대우를 받거나 교사를 할 수 있었을 정도였으니... 100년 넘게 지배를 받으면서 피지배층인 아랍계의 불만이 커지고, 프랑스 측에서 2차대전 승전 직후 알제리인들의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한 [[세티프 구엘마 학살]]이 일어나자 알제리인들은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프랑스 식민제국이 [[프랑스-베트남 전쟁]], [[수에즈 위기]] 등을 계기로 쇠락해가면서 1954년부터 민족해방전선(FLN)을 중심으로 8년간 프랑스와 격렬한 [[알제리 전쟁]]을 벌인 끝에 마침내 1962년 독립을 이루었다. 독립 과정과 그 직후 프랑스군에 부역하며 알제리 민족해방전선과 싸운 알제리인[* 아르키(Harki)라고도 부른다.]들은 보복으로 학살당하거나 프랑스 본토로 도망가야 했는데, 이들은 상당수가 문맹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에 정착해서 좀도둑이나 막노동일에 종사하며 빈민으로 정착했다고 한다. 피에-누아르들의 상황은 아르키만큼 처참하지는 않았으나, 알제리에서 프랑스로 피난오는 과정에서 파산한 사람들이 많기는 이쪽도 매한가지였다. 특히 알제리에서 살던 유대인들 상당수는 프랑스 본토로 피난 온 후에 명목상 기독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많았다. 알제리 독립 전쟁 과정에서 여성들이 대거 민족해방전선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이 덕분에 알제리는 다른 보수 이슬람 국가들에 비해서 여성 인권이 진보적으로 보장받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알제리 독립 이후에 여권을 축소시키려는 이슬람 보수주의자들의 압력이 있었으나 알제리 독립을 도와준 인사들 일부가 눈치를 준 덕분에 일정 수준 이상 유지되었다.] 그러나 인구 대다수인 아랍계와 오랫동안 여기 살아오던 이마지겐들 사이의 갈등이 고민거리로 남았다. 이들은 보통 [[베르베르]]인이라고 불리는 북아프리카 유목민들로 스스로를 이마지겐으로 부른다. 아랍인들과 베르베르인 사이의 통혼이 적지는 않다. 다만 해안지대에 살며 프랑스어를 쓰는 아랍인 상류층들이 척박한 내륙에 사는 베르베르인들을 촌놈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