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장왕 (문단 편집) == 생애 == [[문자명왕]] 7년인 498년 [[태자]]에 책봉되었고, 문자명왕이 승하한 [[519년]]에 왕위에 올랐다. 즉위한 후 그는 [[가뭄]]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던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구휼하는 한편 증조부인 [[장수왕]] 때부터 유지되었던 [[중국]] [[남북조]]에 대한 양면 외교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갔다. 그 때문인지 [[북위]]와 [[양(육조)|양]]으로부터 고구려 왕 작위를 책봉받기도 했다. 그러나 옛 [[후연]]의 수도였다가 [[북위]]의 평주가 된 용성을 습격해 [[약탈]]을 한 기록도 남아있다. 한편 523년 8월 백제군과 패수 전투를 치름으로써 [[백제]]를 상대로 본격적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529년]]에는 혈성 전투, [[오곡원 전투]][* 다만 오곡원의 위치 등으로 인해 실제 여부를 의심받고 있다. 하지만 문자명왕 때 백제가 치양(지금의 [[황해도]] 배천)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뉘앙스의 기록이 있어 진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등을 벌여 승리를 거두고 그 후에도 추가적인 공격을 감행[* <한씨 미녀 설화>에 따르면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인 달을성현과 개백현까지 안장왕이 공격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안장왕의 추가적인 정벌을 암시하는 기록인 셈.], 전세를 어느 정도 뒤바꾸는데 성공했다.[* 기록에는 백제 [[동성왕]] 때부터 [[한강]] 유역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언급이 자주 나타난다. 심지어 안장왕과 <한씨 [[미녀]] 설화>에서도 그대로 나올 정도. 이에 학계에서는 [[동성왕]]~[[무령왕]] 시기 웅진백제에 한강 유역을 빼앗겼다가 전열을 재정비한 때인 안장왕 시기에 다시 [[고구려]]가 되찾았다는 견해가 꽤 신빙성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흔히 고구려의 전성기를 언급할 때 [[광개토대왕]] - [[장수왕]] - [[문자명왕]] 시기까지를 언급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히 말하면 이전 시기에는 못 미칠지언정 안장왕의 치세까지는 고구려의 전성기가 유지되고 있었다고 보는 게 맞다. 백제를 공격해 두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당시 그의 상대는 후에 백제의 중흥을 이끌게 되는 [[성왕(백제)|성왕]]이었다.] 북위의 평주 용성[* 과거 후연의 [[수도(행정구역)|수도]]였다. 용성은 이미 [[북연]] [[멸망]]시 장수왕이 1번 털러가기도 했다.]을 습격해 약탈하는 과정에서 [[요서]] 지역으로도 발을 뻗는 등 정복 [[전쟁]]을 계속 단행한 걸 근거로 단지 기록이 부족해 알기 힘든 것일 뿐 실제 고구려의 최대 강역은 문자명왕이 아닌 안장왕 때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물론 추측의 영역일 뿐이라 일각에서는 이 때가 아니라 훗날 [[고구려-수 전쟁]]을 치른 [[영양왕]] 시기를 고구려 최대의 강역으로 보는 추측도 있는 등 학설은 다양하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승하]]한 해가 531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서 틀렸다고 지적했던 《[[양서]]》에서는 526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선왕들의 연혁을 이용하여 [[계산]]해보면 [[평균]]적으로는 장수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후사가 없었는지 나이 차가 제법 날 것으로 추정되는 동생 안원왕이 뒤를 이었다. >十三年 夏五月 王薨 號爲安藏王【是梁中大通三年 魏普泰元年也 梁書云 安藏王在位第八年 普通七年卒 誤也】 >13년 여름 5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호를 안장왕(安藏王)이라 하였다.【이때는 양나라의 중대통(中大通) 3년이요, 위나라의 보태(普泰) 원년이다. 《[[양서(역사책)|양서]](梁書)》에는 ‘안장왕이 재위 8년, 보통(普通) 7년에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안장왕- ---- >(25년) 겨울 12월 병신(丙申) 초하루 경자(庚子) (덴노를) 아이노노미사사키(藍野陵)에 장사(葬事)지냈다.【어떤 책에는 덴노가 28년 갑인(甲寅)년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25년 신해(辛亥)년에 죽었다고 한 것은 《[[백제본기]]》(百濟本記)를 취하여 쓴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에 "'''신해년(辛亥年) 3월에 군대가 나아가서 안라(安羅)에 이르러 걸탁성(乞乇城)을 쌓았다. 이 달에 고려(高麗)는 그 왕 안(安)을 죽였다. 또한 일본의 덴노와 태자(太子), 황자(皇子)가 함께 죽었다고 들었다.'''"라 하였다. 이에 따라 말한다면 신해년(辛亥年)은 25년에 해당한다. 뒤에 교감(校勘)하는 자는 알라】. >---- >《일본서기》 <[[케이타이 덴노]]> 25년(531년) 12월조. 그런데 《[[백제본기]]》를 인용한 《[[일본서기]]》에는 안장왕이 [[시해]]당한 것으로 나와 있다. 만약 《일본서기》의 기록대로 안장왕이 시해당한 게 사실이라면 안원왕 때부터 시작된 고구려의 혼란상이 쉽게 설명가능한 측면은 있다.[* 백제에서 장수했던 [[위덕왕]]도 정황과 여러 사료들로 인해 시해당했다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다만 시해를 당한 배경과 이유에 대해 언급이 되어 있지 않아서 정확한 내막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애초에 《양서》 등 다른 나라의 기록 뿐 아니라 《삼국사기》 등 [[한반도]] 측 [[역사서]]에는 직접 언급은 커녕 간접 암시조차 일체 없는 내용이라[* 시해설이 도는 임금들 중 백제의 [[아신왕]]이나 [[비유왕]] 같은 경우에도 시해의 징조인 듯한 뉘앙스의 기록이 죽기 전에 나와 있다. 자세한 사항은 [[아신왕]], [[비유왕]] 항목 참조.] 무조건 진실이라 단정짓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게다가 고구려의 본격적인 혼란 및 쇠락이 시작된 것이 후대의 안원왕 시기 정확히는 말엽부터인지라 더욱 사실이라고 단정짓기가 어렵다. 실제로 안장왕 사후 보위에 오른 안원왕은 기록 상으로만 보면 왕위 계승 분쟁이 터지기 전까지 나라를 제법 무난히 다스렸다.][* 다만 학계에서는 안원왕 말엽 벌어진 추군 세력과 세군 세력 간의 권력 다툼에 대해선 거의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안장왕 시해기록과는 달리 안원왕 말엽의 권력 다툼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자세할 뿐더라, 마침 《삼국사기》의 <[[거칠부]] 열전>에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난 고구려의 쇠퇴 정황과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기도 한다.] 어쨌든 전성기를 유지시킨 안장왕의 치세를 끝으로 이후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부터 내려오던 명군의 맥이 끊기고, [[고구려-수 전쟁|몇]][[살수대첩|몇]] [[안시성 전투|반]][[사수 전투|등]]을 제외하면 서서히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