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리우스파 (문단 편집) == 주요 교리 == 아리우스파의 핵심은 [[야훼]]([[성부]])와 [[예수 그리스도]]([[성자]])가 이질적이고 차별적인 존재라고 본 것이다. 사제 아리우스는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본질이며 동격인 존재"라는 아타나시우스파의 [[삼위일체론]]를 정면 부정하고 [[그리스도]]는 성부가 세계의 구원을 위해 만든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성부와 동격, 혹은 동일한 본질일 수 없고, 오로지 이질적 본질(heterousios)에 불과하다고 주장해 범 아타나시우스계가 내세우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격하시켰다. 아리우스파의 대표적인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다. * 아들 즉 성자 로고스([[예수 그리스도]])는 성부(聖父) [[하느님]]의 최초이자 최고의 피조물이며 [[하느님]]과 세상 간의 중보자 보혜사이고, 인지 가능한 모든 시간 전에 성부의 뜻에서 유래하여 '''[[무|무로부터 창조되어]]''' 세상을 창조하였다. * "'''[[아들]]'''"이라는 용어는 [[비유]]이며, [[예수]]가 [[하느님]]과 같은 존재이거나 지위를 나누어 가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이레네오]]가 [[영지주의]]를 지적하면서 언급한, 아들로 칭해지는 존재는 아버지, 아들, 그리고 "입양된 자"뿐이라는 언급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 아들의 지위는 그 자체가 아버지의 의지의 결과이다. *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버지가 아니었던 시기가 있었으며 하느님의 말씀 즉 성자는 영원 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닌 무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성자는 영원치 않고 시작이 있으며, 존재치 않았던 때가 있었다. * [[성령]]은 성자의 첫 피조물이자 비인격적 활동력이다. * '''[[상하관계|그러므로 성부에 성자가 종속되고 성자에 성령이 종속된다.]]''' 이러한 내용을 핵심 교리로 삼고 있는 아리우스파 기독교는 [[삼위일체]]를 핵심적 교리로 삼는 아타나시우스파 기독교[*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네스토리우스파]]]와 공존하기 어려운 [[이단/기독교|이단]]으로 간주되는 내용이었다. 아리우스파의 교리는 비록 직계후손은 아니지만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 혹은 [[유니테리언]]의 교리와 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이 아리우스 논쟁이 전 [[그리스도교]] 세계의 대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이 때문에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그리스도교]]를 합법종교로 인정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종교가 양분될 위기에 처했다. 본디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직 완전히 기독교화되지 않은 로마제국에서 태어났던 [[로마인]]이라 교리가 어떻게 되든 의례만 잘 지키고 [[로마 제국]]만 통합되면 별 상관이 없다는 식의 생각이었던 듯하다.[* 사실 각 종교별로 강조점이 다른데 기독교는 믿음,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율법준수, [[불교]]는 깨달음 등이다. 그리고 [[고대 로마]] 종교에서는 그것이 예식 참례였기에 신앙이 전혀 없어도 종교예식에만 참례하면 해당 종교를 신봉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기독교 박해 당시 분향하는 척만이라도 하라고 종용한 이유가 그것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교회의 분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최초로 공의회를 열 것을 명하여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주재하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는 황제의 강압 속에 아타나시우스파가 승리하여 "성부와 성자는 동일한 본질(homoousion)"로써 [[삼위일체]]가 정통임이 천명되었고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매우 간결하며 일관성이 있고 논리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서]]에는 예수가 하느님과 구분되는 듯한 구절과 동일시되는 듯한 구절이 모두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복음서의 이런 태생적인 내부 모순점은 결국 아타나시우스파와 아리우스파의 논쟁, 그리고 이후에도 [[단성론]], [[단의론]] 등 지리하고 피비린내 나는 기독교의 교리 싸움이 전개된 원인이 되었다. 당시 아타니시우스파의 삼위일체론은 이 모순되는 부분들을 표면적으로 봉합시키기 위해 여러 우회 장치들을 사용했다. 이런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에 대한 논리적 모순을 따지는 것은 일반인들이 판단하기는 쉽지 않은 문제들이었다. 반면 아리우스는 교리 자체의 일관성, 통일성, 논리적 무오류를 위해 복음서에서 모순되는 두 내용 중 한쪽은 취하고 다른 쪽은 무시하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파는 이 부분을 맹렬히 파고들며 공격했고 결국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몰았다. 처음에 기독교에 거의 무지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일단 교리 통일이라는 정치적 목적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애초에 공의회를 열기 전부터 교회 내에서 훨씬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고 나섰다. 결국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서 진행된 공의회는 아타나시우스파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의 주장은 난해한 삼위일체론과는 다르게 이해하기 쉽고 간결했고 일관성 있어 보였기 때문에 수세기 이상 세력을 떨쳤다. 게다가 처음에 기독교에 무지하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점차 기독교 교리에 대해 깊이 파고들면서 오히려 아리우스파에 빠지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말년에 아리우스를 측근으로 두었을 정도였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후계자들인 역대 황제들이 아리우스파를 신봉해서 도리어 삼위일체파가 탄압을 받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아리우스파는 [[유럽]]에서 [[게르만족의 대이동|침입을 격화하고 있던]] [[게르만족]]에게도 대대적으로 포교하여 많은 게르만족이 아리우스파를 추종하는 현상마저 일어났다. 아리우스파가 이렇게 위세를 떨치는 가운데 381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소집한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삼위일체 천명을 재확인하고 아리우스파를 최종적으로 이단임을 재확인했다. 이에 따라 아리우스파는 제국 전역에서 탄압당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고트족]]이나 [[반달족]], [[랑고바르드족]] 등 게르만족에게 주로 포교하여 명맥을 이었다. 계속된 교파분쟁의 와중에 게르만족 중 [[프랑크족]]이 500년경[*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다. 기원후 495년설부터 509년설까지 다양하다.] 삼위일체파로 전향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8세기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가 아리우스파를 믿던 다른 게르만족들을 대거 점령하면서 삼위일체설로 개종하지 않으면 몰살하는 정책[* 애초에 카롤루스의 정복 전쟁의 명분 자체가 아리우스파를 믿는 이단을 척결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을 시행했고 이로 인해 아리우스파를 믿던 게르만의 [[작센]]족, [[바이에른]]족 등이 모두 가톨릭으로 강제 개종당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대량학살당하면서 아리우스파가 완전히 사멸했다.[* 카롤루스의 친 가톨릭 정책은 [[게르만 신화|게르만 신앙]]을 유지하던 작센족까지 학살을 당하게 되었으며 독일 지방이 급격히 기독교화되는 계기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