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라/역사 (문단 편집) == [[통일신라]][* [[통일신라]] 문서에도 나오는 얘기지만 [[신라]]의 [[삼국통일|통일]]을 불완전한 통일로 보고 [[고려]]의 통일을 완전한 통일로 보는 측에선 이 시기의 [[신라]]에 대해 '후기 신라'라고 칭하자는 움직임도 있으나 대중적으로는 [[통일신라]]가 더 넓게 퍼진감이 있다.]의 [[발전]] == || [[파일:external/gbnews.tlog.kr/2375f82398ff0b6f3a6908f120805cc8171254.jpg|width=100%]] || [[가야]]와 [[백제]] 고위층 및[[ 진골]] 고위층을 섞어서 이주시켜 만든 서원경(지금의 [[청주시]])과, 주로 고구려 고위층을 이주시켜 설치한 남원경(지금의 [[남원시]] 일대)이 설치되었고, 옛 고구려와 백제의 영역엔 여섯 [[주(행정구역)|주]]를 설치하여 [[9주 5소경]] 제도가 완성되었다. 또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백제계 인구를 포함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게 되었고, 고구려계 3개 부대,[* 정확히는 고구려인 1개(황금 서당), [[보덕국]]민 2개 부대다.(적금 서당과 벽금 서당) 단 보덕국민들도 고구려 유민이다. 보덕국은 신라가 고구려 유민들을 지금의 [[전라도]]로 이주시켜 만든 체제고, 황금 서당은 전라도로 이주하지 않았던 나머지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 백제계 2개 부대[* 청금 서당과 백금 서당. 부대 상징색은 이름대로 파란색과 흰색.], 신라계 3개 부대[* 따로 언급은 없지만 앞서 시대에 편입됐던 [[가야]] 유민들도 포함한 것으로 여겨진다. 녹금 서당, 자금 서당, 비금 서당. 녹금 서당과 자금 서당은 통일 이전 [[진평왕]] 때 만들었고, 비금 서당은 [[문무왕]] 때 설치한 장창당(長槍幢)을 [[효소왕]] 때 이름 변경한 것이다. 비금 서당은 말 그대로 [[장창]]으로 무장한 부대로 추정.], 말갈계 1개 부대[* 흑금 서당. 상징색은 흑적(黑赤, 검붉은 색)]로 구성된 9서당에, 9주에 각각 1정씩(단 면적이 넓은 국경 변경 지대인 [[한주]]는 2개 정)을 두어 9서당 10정 편제를 완성했다. 신라가 나머지 두 나라를 무력으로 정복한 형태의 통일이었음에도 행정 구역을 고구려 백제 신라의 고토에 각각 똑같이 3주씩, 신라 수도권의 방어와 치안을 담당하는 부대 9서당 역시 옛 삼국 소속국별로 비슷한 비율로 분배해서 배치한 것은 당대 신라의 [[삼국통일]] 의식의 나름대로의 실천으로 여겨진다. 이를 바탕으로 정치와 경제, 사회 전반도 안정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은 스스로의 통치를 돌이키는 과정에서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고 사회 전반의 안정을 가져왔다고 스스로 평하고 있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을 전후하여 나타난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왕권 전제화다. [[태종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군주로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했고, [[갈문왕]] 제도도 없앴으며, 아울러 이 때부터 한동안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나아가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통일 이후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 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당시 통일 신라는 나름대로 파격적인 피정복민 회유 정책도 실시하였다. 신문왕 6년 때는 고구려인들을 위해서 본국(고구려)와의 관품을 해아려 주는 높은 관직을 주었고 문무왕 13년 때에는 백제인에게 서울과 지방의 벼슬을 주었는데 그 관등(官等)을 백제 본국의 벼슬과 견주어 주었다.예를 들어 경관(京官)인 신라의 대나마(大奈麻)는 본국(백제)의 달솔(達率)이었으므로 대나마에 임명하였다. || [[파일:신라절풍.png|width=200]] || || '''신라의 절풍''' || [[삼국통일]]에 힘입어 그 동안 군사력에 치중하였던 역량이 내부로 쏟아지면서 신라는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화려한 예술품들과 [[불교]] [[예술]]이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으며[* 신라의 뛰어난 공예, 건축 문화재들이 모두 이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불국사]]가 이 시기에 중수되고 [[석굴암]]이 건설되었다.], 특히 [[헌강왕]] 시절에는 [[서라벌]]에는 집집마다 [[기와]]가 덮여있었고,집집마다 [[숯]]으로 [[밥]]을 하여 연기가 피어나지 않았던 등 국력의 강대함을 자랑했다.[* 가령 [[구한말]] [[한양]]의 사진을 보면 [[초가집]]도 많았고, 숯으로 밥을 짓는 건 사치에 속했다.] 8세기 ~ 9세기에 들어 [[아랍]]과 [[페르시아]]의 신라에 대한 기록이 크게 늘어나는데,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41107.010340757410001|관련 기사]] 일관적으로 귀금속이 많이 나고 자연 환경이 좋다고 나와있다. 물론 먼 나라의 이야기를 적은 얘기니만큼 황금의 나라 [[지팡구]]처럼 허구나 과장도 어느 정도 있겠으나, 알려진 절대 다수의 사료가 긍정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좋게 보인 게 있는 듯.[[http://archive.org/stream/lesprairiesdor01masduoft#page/346/mode/2up|#]][* 알 마수디( المسعودي )의 기록 <황금 초원과 보석 광산(The Meadows of Gold and Mines of Gems; مروج الذهب ومعادن الجواهر> 프랑스어 번역판 346쪽] [[https://archive.org/stream/historicalencycl00masrich#page/358/mode/2up|영문판]][*이미지 [[파일:external/s22.postimg.org/image.png]] 노란색 부분이 신라(السيلى)', 빨간색이 중국(الصين), 파란색이 이라크(العـراق)다.][* وليس بعد بلاد الصين مما يلي البحر ممالك تعرف ولا توصف، إلا بلاد السيلى وجزائرها، ولم يصل إليها من الغرباء من العراق ولا غيره، فخرج منها؛ لصحة هوائها، ورقة مائها، وجودة تربتها، وكثرة خيرها، وصفاء جواهرها إلا النادر من الناس، وأهلها مهادنون لأهل الصين وملوكها، والهدايا بينهم لا تكاد تنقطع][*영문판 [[파일:external/10b7625e62d7513bcbe6a2eba95fbb683d789c1fe661fcdbadec7c960cd35e55.png]] 영문판 해당 부분.] 사실 [[외국인]], 특히 멀리서 온 [[서역인]]들은 모두 [[수도(행정구역)|수도]]이자 무역 중심지였던 [[경주시]]와 경주를 중심으로 한 인근의 번영한 항구나 도시 등에서 머물렀을테니 당대 [[서라벌]]의 영화로움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저런 식으로 쓰는게 무리는 아닐 수도 있다. [[원성왕릉]]([[괘릉]])을 지키는 [[경주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 일괄|무인상]]도 전형적인 [[중앙아시아]] 수피주의자의 [[터번]]을 쓰고있는 등 직접 보지 않으면 묘사하기 힘들 정도로 자세한 점을 고려할 때 이미 상당수의 [[서아시아]], [[중앙아시아]]계 집단이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당시 [[중동]] 사람들에게는 '''[[섬]]'''으로 여겨져 신라라는 섬이 있다고 기록된 경우가 많았다. 주로 무역 중심지가 배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남쪽인데다, 역사적으로 육로란 육로는 [[고구려]]와 [[백제]]부터 시작해서 [[발해]], [[고려]], [[후백제]] 등이 막고 있었기 때문에 접근할 수 없었으므로 이러한 인식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당시 [[수도(행정구역)|수도]] [[서라벌]]의 [[인구]]는 수십만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서는 "수도에 17만8936호, 1360방, 55리와 35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삼국유사]]》[[진한]]조)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경주 한 곳에만 80만 ~ 90만 명의 인구가 살았다는 뜻. [[고려]] 수도 [[개성시|개경]]의 2배 ~ 3 배, 조선 수도 [[한양]]의 4배가 넘는 수준이다. 그러나 학계는 서라벌은 커녕 [[통일신라]] 국가 전체의 최대 인구를 400만 내외로 추정한다. 또한, 그 시대에 전체 인구 400만명 가운데 경주에만 90만 명이 몰려 살았다는 건 근본적으로 납득이 어렵다. 그리고 [[지도]]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지만 경주 중심부의 경주 분지 지형상 90만 명이나 몰려살 수 있을만큼 들이 넓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경주 분지 땅에서 비교적 외곽 지역인 구 경주 경마장 부지에서도 집단 집터와 숯을 굽던 가마터가 20기나 발견됐다. 이는 당시 경주 분지 땅 안에서 인구 집중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사례이다.] 그래서 삼국유사의 17만 8936호는 17만 8936구(약 35만)의 오기가 아니냐는 주장부터 서라벌과 그 일대 수도권을 다 합친 기록이 아니냐는 등의 설들이 있다. 또한 신라의 수도 범위를 경주로만 한정하지 않고 넓혀서 본다면 90만명이 충분히 살 수 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81&aid=0000124825|관련 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