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슈겐도 (문단 편집) === 천태종 본산파 === 온조지(園城寺, 미이데라)에는 옛부터 쿠마노 삼산[* 일본 와카야마현 다나베시에 있는 혼구 대사(本宮大社)와 신구시에 있는 하야타마 대사(速玉大社), 히가시무로 군의 나치 대사(那智大社)의 세 신사를 통칭해서 부르는 이름. 일본에서는 기이 지역 산악신앙의 성지로 신불습합 이후에는 세 곳의 주제신이 각기 [[아미타불]], [[약사여래]], [[관세음보살|천수관음]]과 동일시되다. 이들은 부처가 신의 모습을 빌어 나타났다고 해서 쿠마노 산쇼곤겐(熊野三所権現)이라 불리는 등 불교적인 색채가 강하며 [[2004년]]에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의 일부로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쿠마노 산잔을 통할하는 직책으로 쿠마노 벳토(熊野別当)가 있었는데, 쿠마노 벳토였던 단조는 겐페이 전쟁 때에는 쿠마노 수군이라 불린 해적 집단을 거느리고 겐지를 돕기도 했다. 산이 많은 곳이다 보니까 오히려 배를 만들 나무를 구하기가 수월했다고.] 등지에 가서 산악 수행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1090년]] [[시라카와 덴노|시라카와]] 상황이 쿠마노를 참배할 때 안내역을 맡은 온조지 승려 조요(増誉)가 쿠마노 삼산의 검교직에 임명됐다.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 쇼고인(聖護院)[* 교토 소재. 조요가 머물렀던 연고가 있는 사찰이었다. 여담으로 조요의 스승이 엔친으로 당에 유학 다녀오는 길에 '''신라명신의 가호를 받아서 풍랑에서 벗어났다'''는 일화가 있는 그 사람이다.]의 몬제키(門跡, 주지) 가쿠죠 법친왕(覚助法親王)[* 고사가 덴노의 황자. 친왕이면서 승려로 출가하면 법친왕이라고 부르고, 이러한 법친왕이나 혹은 구게 출신으로 출가한 승려들이 주지가 되면 몬제키(門跡)라고 부른다.]은 온조지 장리(長吏)과 구마노 삼산 검교를 겸임하면서 쿠마노 삼산, 오오미네 산에서 수행하던 천태종 계열 슈겐쟈를 통제하였고, 16세기 초 무로마치 시대 후기에 구게로 [[후지와라]] [[고셋케]]의 하나인 고노에(近衛) 출신 몬제키 도코(道興)가 이들을 조직화한 것이 본산파이다. 본산파는 국가 또는 군 단위로 가무시(霞)라는 지역 조직을 결성하고 세력을 넓히면서 산보인(三寶院)[* 쇼고인과 마찬가지로 교토에 있다. ]을 본사로 삼고 있던 진언종계의 당산파(當山派)와 대립하게 되었다. 에도 막부 초기인 게이초 연간에 가사를 놓고 두 파벌이 충돌하자, [[1613년]] 막부는 쇼고인과 산보인 두 절에 슈겐도법도(修験道法度)를 선포해 어느 특정 한 계파가 독점하지 못하게 하고 양파 간의 규칙을 세웠다. 슈겐도법도는 본산파의 지역 거점이기도 했던 가무시에 대해 규제했기 때문에 본산파에게 불평등한 조건이었지만, 에도 시대 내내 당산파에 비해 우위를 점하면서 총본산(법두)인 쇼고인 휘하에 엔케(院家)-센타츠(先達)-렌코시(年行事)-지츠마츠인(直末院)-준렌코시(准年行事)-도코(同行) 등의 서열까지 정비했다. 본산파는 [[메이지 유신]] 후의 신불 분리령 및 [[1872년]]의 슈겐도 폐지령으로 천태종에 강제통합되었지만, 쇼고인은 당연히 이 조치에 계속 반발했다. 그리하여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에 본산파는 본산수험종(本山修驗宗)이라는 종파로 독립했고, 이후에 요시노 등에 소속된 몇개 사찰이 금봉산수험본종, 쿠라마홍교 등으로 또 독립해나갔다. 이러한 조치는 당산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당산파는 본산파와는 달리 패전 뒤에도 독립하지 않고 진언종에 통합된 대로 남았으므로, 현재 일본에서 슈겐도의 명맥은 본산파로부터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