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정효황후 (문단 편집) == 호칭 관련 ==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일제강점기]]를 지나 [[대한민국]] 때 사망했기 때문에 사실 정식 [[시호]]는 받지 못했다. 사후 [[종묘]]에 부묘될 때 사용된 명칭은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사시(私諡)인 헌의자인순정효황후(獻懿慈仁純貞孝皇后)이다. 조선조 500년간 왕과 왕비가 종묘에 부묘될 때는 시호가 새겨진 옥책(玉冊)이 함께 제작되어 봉안되는데, 이러한 절차를 밟은 마지막 인물이 순정효황후였다. 순정효황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생존했던 [[영친왕]]이 사왕(嗣王)으로서 시호를 올린 것으로 옥책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당시 제작된 옥책은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시호]]를 올릴 주체인 군주가 사라진 이상 사시가 사실상 정식 시호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녀는 사시의 뒷부분의 다섯 글자인 '순정효황후'로 불리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비]][[전하(호칭)|전하]]', '이왕대비전하'가 신문지상의 공식 호칭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상당기간 '윤씨 성을 가진 [[왕비]]'라는 뜻의 '''윤비'''(尹妃)가 통칭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이왕비', '이왕대비' 신분으로 지낸 기간이 많기에 상궁 등 궁에서 지낸 사람들에게 불린 실제 호칭도 '비(妃) [[전하(호칭)|전하]]', '대비 전하'였다.[* [[덕혜옹주]]가 죽기 전 유서격으로 남긴 메모에도 당시 이미 세상을 떠난 순정효황후를 '비 전하'라고 부르며 그리워하는 내용이 있다.] 해방 후 일제가 내린 [[이왕직]]을 인정할 수 없는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이왕직을 전제로 한 '이왕비', '이왕대비'는 물론 '윤대비'도 사용하기엔 껄끄럽고,[* '대비'라는 호칭은 순종의 뒤를 이은 [[영친왕]]이 '이왕'임을 인정하는 전제에서만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종을 조선의 마지막 군주로 본다면 순정효황후가 '대비'가 될 수는 없다.] 해방 후의 대한민국에서 생존한 채로 지낸 상당한 세월 동안에는 [[시호]]도 존재하지 아니하였으니, 그냥 윤씨 성에 '비(妃)'를 붙인 익숙한 호칭으로서 '윤비'라고 불러왔던 것. 그러나 [[1983년]]에 정부가 [[조선]]의 왕비를 호칭할 때 '성+비'로 된 명칭을 공식 석상이나 역사교과서와 같은 공식 문서에 적지 않도록 규정한 이후로 그녀를 윤비라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주로 순정효황후, '순정효황후 윤씨'라고 불린다.[* 순정황후(純貞皇后)라는 명칭도 쓰긴 하는데, 순정효황후보다는 수가 적다. 순종의 황후들만이 아니라, 2000년 이후로는 대한제국 때 황후로 추존된 다른 조선의 왕비들의 황후로서의 명칭은 네 글자보다는 다섯 글자로 된 경우가 주로 쓰인다. 다섯 글자로 된 명칭이 잘 쓰이지 않는 [[명성황후]]가 예외인 셈.] 참고로 '성+비'가 [[일본]]이 만든 통칭인지 아닌지에 대해 논란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명성황후 민씨]] 문서를 참고할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