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우미양가 (문단 편집) === [[임진왜란]]으로 인해 유래되었다는 설 === 김문길 저 <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라는 저서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신하들에게 적을 베어 온 '''증표'''를 보고 사무라이의 등급을 지정했다는 것을 그 유래로 들고 있다. 이윤옥 저 《사쿠라 훈민정음》에서도 수우미양가의 어원을 설명할 때 김문길의 주장을 인용하고 김문길에게 문의한 결과를 실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이름도 그가 전쟁에서 적을 많이 죽이고 코와 귀를 많이 베어냈다 하여 [[오다 노부나가]]가 하사 해준 이름이다. 당시 [[오다 노부나가]]는 신하들이 잘라 온 적의 머리수로 등급을 매겨서 "수우미"로 판정했는데, 토요토미는 수(秀)에 속하니 히데요시(秀吉)이라 했으며 가장 뛰어난 가신이라 하여 토요토미(豊臣)라는 성을 주었다. >---- >'''김문길, 《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 >(중략) 수우미양가의 정체를 찾아 헤매던 중 의외의 자료를 얻게 되어 확인 차 《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의 저자인 부산외국어대학 김문길 교수에게 문의한 결과 "히데요시의 秀, 優, 良, 可라는 용어는 센코쿠시대 무사들의 용어로서 무사가(武士家) 문서에 자주 나온다." 라는 답변을 얻을 수 있었다.(후략) >---- > '''이윤옥, 《사쿠라 훈민정음》, pp. 83-84, 인물과사상사.''' 다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 휘하에서 전투가 아닌 내정과 건설(하루만에 성 세우기 등)로 인정을 받았다는 점과, 토요토미(豊臣)라는 성도 [[노부나가]]에게서 받은 것이 아닌 [[노부나가]] 사후 1585년 [[오오기마치 덴노]]로부터 하사받은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상기한 책들의 주장은 대단히 현실성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애초에 豊臣이란 성 자체도 그리 좋은 뜻이 아니다. 당시 천황이 천민 출신 히데요시에게 신하는 많은데 자식이 적다는 것을 비꼬기 위해서라는 속설이 있을 정도.] 또한 위에서 보듯 秀는 優보다 더 늦게 도입된 성적 표기라 과연 500년 전에 優가 아닌 秀를 사용했을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옛 이름 '토키치로(藤吉郎)'와 새 이름 '히데요시(秀吉)'를 한동안 병기한 것으로 보이는데[* 秀吉라는 이름이 가장 최초로 발견되는 문헌적 근거는 1565년 11월경 노부나가가 미노(美濃)의 토호에게 보내는 문서. 木下藤吉郎秀吉라고 기재되어있다(일본어 위키피디아).] 주군(노부나가)로부터 이름을 새로 하사받는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기록에 남았을 것이고 새 이름을 전면에 쓰는 것이 합리적일텐데 '木下藤吉郎秀吉' 식으로 옛이름, 새 이름을 함께 사용했으며, 이름을 하사했다는 [[오다 노부나가]]가 직접 보내는 문서에서도 그런 식이었다. 이는 오히려 자기 스스로 이름을 만들어 상당 기간 사용(홍보)했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노부나가가 '히데요시'라는 이름을 정말 하사했고 이에 대한 1차적 사료가 남아있다면 (수우미양가 논쟁을 떠나서) 전국시대가 인기 많은 일본에서도 어느 정도 '히데요시'라는 이름의 유래로서 얘깃거리가 되었을 것인데 정작 그런 자료를 찾을 수 없는 것도 의문이다. 또한 이와 별개로 단순 하사한 것이 아닌, 토키치로가 오다 가문 가신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니와 나가히데]]와 [[시바타 카츠이에]], [[아케치 미츠히데]]에게서 따와 하시바(羽柴)라는 성과 히데(秀)라는 이름을 받았다는 설이 존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