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우미양가 (문단 편집) == 유래 == 흔히 [[일제강점기|일제]]의 영향이라고 하지만, 사정은 꽤 복잡하다. 일본 교육제도에서 평가단계가 등장한 것은 1897년. '갑을병정'(甲乙丙丁)이라는 단계를 정책적으로 택해 전국적으로 쓰면서부터이다. 그리고 이는 일본 [[에도시대]]의 '갑을'(甲乙) 평가 단계에 기원을 둔 표현이었다고 한다. 1900년에는 학적부에 성적을 기재하는 것이 의무화되고 일부 현에서는 통지표가 발송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8년에는 일본 [[문부성]]에서 성적 표기 방법을 통일하여 [[상대평가 대 절대평가#s-1.1|상대평가]]식 10점법이 도입됐고, 優(우), 良(양), 可(가) 평가 방식은 품행 성적에서만 사용되었다. '갑을병정' 방식도 동시에 사용되기는 된 모양. 지금도 춘추가 90에 가까운 어르신들이 ‘조선어 과목은 항상 ‘갑’을 받았다.’거나 ‘간이학교 때 산수 과목에서 ‘을’ 한 개 받은 것 빼고 나머지는 전부 ‘갑’이었다.’와 같은 말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1941년에 들어서야 절대평가로서 우리가 아는 '수우미양가' 표기가 전면에 등장하지만 우리가 아는 '수우미양가' 평가 방식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1941년 도입된 절대평가 방법은 優(우), 良(양), 可(가)라는 3단계 평가였고 1943년 들어서야 秀(수), 優(우), 良(양), 可(가), 不可(불가)라는 5단계 평가가 등장했다. 즉, 엄밀히 말하자면 일본에서는 '수우미양가'라고 하지는 않았다. 일제시대에 학교를 다닌 어르신들은 우양가 체계를 체험했기에 지금도 "우"를 1등으로 아는 경우가 많다. 전후 당시의 일본 교육계의 권위적인 모습과 절대평가 방식은 반성의 대상이 되었고 전쟁 후에는 일본 사회 전반의 민주화에 발맞춰 학생의 각 재능[* 친화력이나 글쓰기 실력 등]별로 좋고 나쁨의 정도를 평가하는 독특한 평가방식이 도입되었으나 이런 평가 방식으로는 당시 일본 사회가 원하던 일률적인 서열화를 시키기에 무리가 있다고 판단, 1955년 초중고 전부 통일하여 1~5점으로 학생의 성취를 채점하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이때의 5점법은 정규분포 7%, 24%, 38%, 24%, 7%에 해당하는 학생에게 5, 4, 3, 2, 1점의 점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일본 초중등학교에서 優, 良, 可 또는 秀, 優, 良, 可, 不可 같은 평가 방법은 길어봤자 4년밖에 쓰지 않아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점을 종합해 보면, 해방 후 한국에서 '수우미양가' 방식을 사용한 것은 일제의 잔재라기보다는 '수우미양가'라는 단어에 내포된 교육적 의미를 당시 한국의 교육자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에 가까울 것이다. 실제로도 본래 일본의 평가방식에서는 不可에 해당하는 등급을 可로 바꾸고 중간에 美 등급을 추가한 것은 일제의 잔재가 아닌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창안한 방식이다. 단, 대학교에서는 [[와세다대학]] 등의 일부 사립대학교에서 바리에이션을 넣어 자주 쓰인다.[* 예를 들어 가장 기본형인 優, 良, 可에서부터 秀, 優, 美, 良, 可 식의 변형 등 여러 종류가 있다.] 대개 로마자 성적 표기(A, B, C, D, E)와 같이 쓰인다. 학교마다 달라서 콕 집어 얘기할 수 없다. 초등, 중등교육에서는 사라졌지만 대학에서는 아직 쓰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