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쇼와공황 (문단 편집) == 배경 == 쇼와 공황의 발단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의한 전시 버블(=다이쇼 버블)의 붕괴와 경기과열 그리고 관동대지진이 있다. 일본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호황기였다. 전장(戰場)인 유럽에 물건을 대줄 나라가 많지 않았다. 무기도 팔았고 농산물도 팔았다. 이 무렵 일본은 미국에 이어 무기수출 2위국이 됐다. 면(綿)시장에서도 일본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다른 나라들은 면사(綿絲)나 면직(綿織)을 만들 겨를이 없었다. 배를 만들고 나르고 하는 일들도 일본이 맡았다. 조선과 해운업이 급속도로 성장했던 배경이다. 워낙 돈을 많이 벌다보니 이때를 가리켜 일본은 '벼락부자'라는 일본어 '나리킨(成金)'을 써 '나리킨의 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문제는 전쟁이 끝난 후였다. 1918년 전쟁이 끝났다. 그럼 호황도 끝난다. 하지만 돈에 취한 일본이었다. 호황이 더 오래 갈 것이라 판단했다. 유럽이 산업적으로 회생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봤고 중국시장은 여전히 확장일로에 있을 것으로 여겼다. 일본 기업들은 '호황'에 베팅했다. 생산에 더 많이 투자했고 주가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추후 밝혀졌지만, '거품'이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 2년 가까운 이 호황기를 일본경제학자들은 당시 천황의 이름을 따 '다이쇼(大正) 버블'이라 이름 붙였다. 버블은 오래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유럽의 재기(再起)가 일본의 예측보다 빨랐다. 게다가 중국에서 일본 제품을 파는 것도 어려웠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행태로 중국 내 반일(反日) 감정이 급속도로 커진 탓이었다. 생산과 수출이 줄고 재고와 적자가 늘고 있었다. 이 같은 경영환경 변화에 가장 예민한 것이 주식시장이다. 1920년 들어 주춤거리던 주가가 3월 들어 폭락을 시작했다. 폭락이 본격화된 4월부터 3개월 동안 주가는 반 토막에서 1/3토막까지 떨어졌다. 150개 이상의 전국 각지 은행에서는 뱅크런(Bank Run) 현상까지 일어났다. 1927년 일본 쇼와(昭和) 금융공황의 결과로 예금인출 소동이 발생하고 77개 보통은행이 도산했다. 전체 보통은행(시중은행)의 10%가 문을 닫았다는 쇼와금융공황이 속으로 남긴 상처는 훨씬 컸다. 파산한 은행의 대부분이 중소 규모여서 피해는 주로 중소기업에 집중됐다. 재벌 산하의 대형 과점 은행이 관료의 지위를 받는 일본 특유의 선단식 경영 형태가 이 때부터 나타났다. 일반인 사이에서는 시장 경제와 금융은 불안정하고 불공평한 것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결국 1930년대 일본은 급속하게 군국주의로 치달았다. 조선도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1929년, 입헌민정당의 하마구치 오사치(濱口 雄幸) 내각이 출범하게 된다. 입헌민정당은 기성 정당 중에서도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당에 속하는 정당으로서, 하마구치 내각은 중지되어 있던 금 수출을 재개하는 [[금해금]](金解禁), 경쟁력 확보를 위한 산업 합리화와 긴축 재정 등의 개혁 정책을 천명하며 불황 타개에 나섰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일본에 대공황이 들이닥친다. 금해금 조치로 인해 유동화된 환율은 요동치기 시작했고, 주가와 물가는 폭락하면서 공장이 도산하고 실업자가 속출한다. 국가 경제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정당 내각의 연이은 정책 실패로 인해 국민들은 점점 정계와 정당 정치에 회의감을 느꼈다. 정당 내각의 연이은 실패는 국가주의자들과 군부를 불러냈다. 기성 정당들의 정책 실패가 반복되고, 비전 제시가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국가주의자들은 개인주의, 자유주의와 같은 과도한 서양 사상의 유입 때문에 현 시국에 이르게 된 것이라며 일본의 국체를 바로 세워야 함을 주장했다. 덴노를 중심으로 정치 질서를 재편하고, 관료와 재벌, 정당 등의 세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당시 상황에 염증을 느끼던 일본인들에게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심지어는 정당 정치가들도 정권 획득을 위해 이들의 주장에 편승하면서 정당 정치는 외부의 공격과 내부의 자멸로 1930년대 들어 아예 무너져 버린다. >여러분은 5반보(약 300평)의 토지를 가지고 아들을 중학교에 보내겠는가, 딸을 여학교에 다니게 할 것인가. 불가능할 것이다. (…) 일본은 토지가 좁고 인구는 과잉이다. 이것을 좌인은 잊고 있다. 따라서 국내의 토지 소유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것으로는 개혁이 불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국내에서 외부로 눈을 돌리지 않으면 안된다. 만몽의 옥토를 보라. (…) 여러분은 5반보가 아니라 일약 10정보(약 3만 평)의 지주가 될 수 있다. 즉 부자가 될 수 있다. >---- >- 1930년, 육군의 '시국대강연회' 중 일부 내용. 당시 육군의 프로파간다를 잘 보여 준다.[* 가토 요코,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어문학사, 2012, 22쪽에서 재인용.] 일본 국회는 규모가 급증한 ‘재난 극복용 특별어음’을 정리하기 위한 국채를 발행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합의 단계에서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주로 대만은행을 통해 지원한 대규모 자금이 지진 피해 기업보다 여당과 친한 독과점 대기업 ‘스스키 상회’에 집중적으로 흘러 들어간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야당은 국채 발행 계획이 ‘정상모리배(政商謀利輩)와 불량 은행 구제를 위한 것’이라며 반대로 돌아섰다. 국채 발행에 동의하되 ‘정부와 일본은행 지원금의 정확한 규모 및 지원 기업 명단을 제출하라’는 조건도 달았다. 여당과 대장성은 이를 거부하자 의사당에서 난투극까지 벌어졌다.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뒤늦게 특별 자금 지원책을 발표하고 돈을 마구잡이로 찍어 풀었다. 얼마나 사정이 다급했는지 뒷면이 백지 상태인 지폐까지 발행했다. 뒷면 도안이 없어 ‘우라지로(裏白·이백:속이 하얗다는 뜻)’라고 불린 화폐가 일으킨 돈이 홍수는 인출 사태를 가까스로 막았다. 일본은행은 ‘우라지로’ 200엔권을 500만장(10억엔) 인쇄했으나 1억6,000만엔이 풀린 시점에서 시장이 안정돼 발행을 멈췄다. 긴급 발행된 200엔권은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일본은행이 열심히 거둬들였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의 화폐사를 통틀어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반쪽짜리 지폐인데다 빨리 회수한 통에 이 화폐는 수집가 사이에서 166만엔 이상에 거래된다고 한다. 상태가 좋은 것은 400만엔도 호가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