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속주 (문단 편집) === [[이탈리아]] === '''Italia''' [[파일:Roman_Italy.gif]] 로마의 발상지이자 수도인 [[로마]]가 위치한 곳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까지는 로마 제국의 형식적·실질적인 본국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대 개막 이후에도 로마의 법률상 본국이다. 위의 지도에서 이탈리아 내 지역 넘버링이 남쪽이 북쪽보다 앞섰으며,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넘버링이 뒤로 가던 것으로 보아, 이탈리아 내에서도 북이탈리아보다는 남이탈리아가 더욱 우대받았던 지역인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북이탈리아까지 이탈리아 본국으로 포섭되었던 것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넘버링을 매긴다면 영광의 1번은 당연히 로마 시와 그 주변의 라티움에 주어지는 것이 당연한데, 그 라티움이 북쪽의 에트루리아가 아닌 남쪽의 캄파니아와 묶여 '라티움과 캄파니아'로 합칭되어 있는 것도 주목할 만 하다. 본국 내지 로마 공화국의 유일한 모체가 된 시기는, 기원전 87년 "모든 이탈리아 민족 및 자유민에게 로마시민권과 완전한 권리 및 명예을 부여한다"고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시민권 법>이 통과된 직후부터다. 허나 로마 공화국/제국에서 본국 이탈리아라는 이름으로 이탈리아 반도가 규정되고 다른 속주와 그 지위가 다르게 명시된 것은 아우구스투스의 속주 및 지방행정 개편때부터다. 개편 당시 로마 시를 14개 구(區)로 나누었는데, 이탈리아 반도 또한 14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다. 여기에는 11개였지만, 후대 가서 증설했다고 한다. 원래 이탈리아란 [[개념]]은 오로지 지리적인 것으로서 [[이탈리아 반도]]를 뜻하는 말이었다. 즉, [[동맹시 전쟁]] 이전에는 정치적 행정적으로 '''본국 이탈리아'''라는 개념이 아주 없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명확하게 정착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동맹시 전쟁 이전의 이탈리아 반도는 도시국가로서의 로마와 동맹 도시국가 연합체인 로마 연합 그리고 여러 로마의 사유지와 [[에트루리아]] 족, [[삼니움]] 족 등의 [[부족]][[국가]] 또는 그 [[영토]]들이 섞인 [[짬뽕]]과도 같은 상태였다. 또한 로마 연합의 동맹국 시민들은 로마 시민권 보다 한 단계 격이 낮은 라틴 시민권[* 로마 시민권과 다른 권리는 동일하지만, 공직 선거권·피선거권(suffragio)이 없다. 이것을 Civitas sine suffragio(영어로는 Citizenship without suffragette)이라고 했다.]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이민족을 포용한 다는 점에서 굉장히 장점인 제도였지만 '''라틴 시민권을 로마 시민권으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로마가 아직 이탈리아 반도에 국한되어 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포에니 전쟁 이후 지중해 세계 곳곳에 속주를 두게 됨으로서 동맹국 시민에 대한 [[역차별]]이 되었다. 비유하자면 포에니 전쟁 때 끌려온 카르타고인 [[소년]] [[노예]]가 능력만 좋으면 주인의 신뢰를 얻고 장성하여 자유를 '''구입'''할 수 있었고 그 소년의 [[자식]]이나 [[손자]]대에 가서 일정 재산을 갖추게 되면 로마 시민권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포에니 전쟁에 참여한 동맹국 시민은 [[역차별|영원히 라틴 시민권에 만족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또한 로마 연합 초기에 로마에게 정복당한 동맹시들은 병력 지원을 구실로 한 병력 징발은 당했을지 언정 병력 징발 외 추가적인 [[배상금]]이나 [[노예]]화, [[약탈]], [[조공]]도 없었으며 전리품도 똑같이 나누어 가졌다. 하지만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가 갖게 된 해외 속주 영토 및 영토의 생산물은 점점 로마가 독식하게 되고 동맹시에게 돌아오는 것은 거의 없어지게 된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로마의 동맹시들이 서서히 불만을 갖게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되자 기원전 91년, [[호민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이러한 불만 및 사회적 문제를 막기 위해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 반도 전역으로 확대하자고 하였으나 기득권 층은 물론 [[프롤레타리아|무산자]] 로마 시민까지 반대하였다.[* 무산 시민들이 반대한 것은 19세기 미국에서 [[푸어 화이트|형편이 썩 좋지 않은 백인들이]] 흑인 노예 해방을 반대한 원리와 유사하다. 내가 가난하다 해도 어쨌든 로마 시민이라는 자부심으로 주변의 이탈리아계 비시민들보다 신분이 높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시민권을 확대하게 되면 이게 무너지기 때문.] 반대만 하면 모를까 기득권 층은 드루수스를 [[살해]]해 버리는 짓을 저질러 버렸고, 중재 역을 해줄 드루수스가 사라지자 동맹시 및 이탈리아의 부족들은 일제히 반기를 들게 된다. 이를 동맹시 전쟁이라 부른다. 피첸토족, 베스티노족, 마루키노족, 파엘리노족, 마르시족, 프렌타노족의 반란으로 시작되었으며 독자적 수도(코르피니움), 독자적 국명(이탈리아), 독자적 화폐와 상징(로마의 [[늑대]]에 대비되는 이탈리아의 [[황소]])을 만들었다고. 이 전쟁은 [[가이우스 마리우스|마리우스]], [[술라]],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이때 폼페이우스는 [[10대]] [[청소년]]이었다!] 등 로마의 쟁쟁한 정치가들이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큰아버지]]이다. 이 때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생이므로 10살 남짓한 어린이였다.]가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 반도 전역으로 확대하는 법안을 내고 민회의 찬성을 얻음으로써 동맹시 전쟁은 종결된다. 동맹시 전쟁의 결과로 [[한니발]]이 [[포에니 전쟁|침공 했을 때]]도 굳건하였던, 로마와 동맹 도시국가의 연합체인 로마 연합은 해체되고, 로마 연합을 이루던 도시들은 모두 합병되어 본국 이탈리아의 각 지방을 구성하게 된다. 로마는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전환이 되었으며, 한 국가 그 자체 이기도 하였던 로마는 영토국가의 수도가 된다. 그리고 합병된 도시 국가들을 가리키던 단어인 무니키피움(municipium)은 본국 이탈리아 내의 각 지방으로 의미가 변했다가, 오늘날 영어의 municipal, 즉 [[기초자치단체]]의 의미로 정착했다. 아우구스투스의 프린키파투스(원수정) 이후를 기준으로 보면, 로마인들의 관습 및 법률상 본국으로 명시된 지역인 만큼,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편 전까지 로마 황제와 로마 정부에게 속주와 구별되는 본국으로 대우받았다. 이는 아우구스투스와 그 일가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래에서 시작된 여러 조치들이 [[베스파시아누스]] 이래, 현직 로마 황제가 반드시 해야 할 덕목이자 의무가 되었던 것이 컸다. 그러나 황제들이 이 의무를 하지 않더라도, 법률상 본국 이탈리아에 대한 특권 보장이 규정된 터라 본국 거주 로마시민권자들은 속주 거주 로마시민권자와 달리 누리는 혜택이 많았다. 먼저, 이탈리아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 시민권자는 직접세를 내지 않았다(다만, 직접세 외의 상속세, 토지재산세, 노예세 등은 부과됐다). 또 이탈리아는 다른 속주들과 달리 역대 황제와 원로원, 정부에게 각종 인프라(도로, 항만, 수도교, 하수시설 등)를 제공받고, 모든 공공건축물 사용 혜택 역시 무료 혹은 저렴한 비용으로 다양하게 제공됐고, 로마 거주 로마시민권자는 [[아우렐리아누스]]의 개혁 전까지는 매일 식료품을 제공받았다. 그러나 [[3세기의 위기]] 동안 이탈리아가 황제 교체 무대가 되고, 전염병과 이민족들의 침공으로 사회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면서 상황은 변하게 된다.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 이후부터 수도 로마의 중요성은 떨어지고 대신 북이탈리아 평원의 [[밀라노|메디올라눔]], [[라벤나]] 등 지방도시들이 중심지화되고[* 이는 로마 시가 이탈리아의 중서부에 있었던 관계로 북방의 라인 강, 다뉴브 강 전선과 매우 멀었으며, 또한 이탈리아 기준의 서해([[티레니아 해]])와는 가깝지만 동해([[아드리아 해]])와는 멀어서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정부와의 소통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막센티우스]]를 제거한 이후부터 시작되는데, 콘스탄티누스 왕조 아래에서 이탈리아는 사실상 법률상 본국 정도로 그 위상이 하락하게 된다. 그러다가 후기 로마제국의 중심이 동방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이 [[콘스탄티우스 2세]] 아래에서 그 지위를 보장받으면서 실질적인 본국 지위는 상실하게 된다. 그렇지만 420년대 초까지는 어쨌든 제국의 발상지이자 서로마의 중심으로 형식상 지위는 유지했고, [[서로마 제국]] 시기까지도 여전히 서로마 관할 정부의 중심지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