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선규 (문단 편집) == 생애 == 1903년 [[전라북도]] 익산군 팔봉면(현 [[익산시]] 팔봉동)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일본]] [[후쿠시마]]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8.15 광복]] 직후 [[경성부]] [[동대문구청장]]을 역임하였다. 이듬해인 1946년 [[미군정]] 하에서 [[서울특별시 부시장]]을 역임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전라북도 익산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대한국민당]] [[백형남]]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5년 민주당에 합류하여 구파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1955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다가 [[자유당]] [[김형섭(정치인)|김형섭]]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4.19 혁명]] 후에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전라북도 [[대한민국 참의원|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초대 참의원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5.16 군사정변]] 후인 1963년 [[민정당]]에 몸담았다가 민정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당(1963년)|자유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민정당, 자유민주당, 민주당, 국민의 당이 야당 통합을 추진할 때 이를 거부하여 한동안 [[무소속]]으로 남았다. 뒤에 통합야당인 [[민중당(1965년)|민중당]]에 참여하였다. 민중당 소속일 때 [[한일기본조약]]에 대해 장기적 안목으로는 필요하므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신민당(1967년)|신민당]] 공천에서 탈락하였다. 1968년 8월 17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권농동 92-1 자택에서 위장병과 담낭질환과 암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익산 왕궁면 용화동의 선산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