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련군정 (문단 편집) === 종결 === 미군정이 끝나면서 미군과 소련군은 동시철수를 개시했다. 하지만 미군이 한국군에게 애초 약속했던 수준보다도 못한 소화기와 약간의 물자만 넘겨주고 [[고문관]]도 500명 미만으로 남긴데 반해, 소련군의 경우 [[T-34-76|T-34]] [[전차]]와 [[Yak-3]] [[전투기]], [[어뢰정]]을 비롯한 [[중화기]] 일체와 관련 군수물자를 통째로 넘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공짜는 아니고 구매비용으로 북한지역의 공업물자나 시설/농산물을 뜯어갔다.] 고문관도 3,000명 이상 남겨놓았다. 이들 소련의 고문관들은 조선인민군의 훈련은 물론 6.25 전쟁 당시 북한의 남침 계획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인민군 육군 6사단 출신으로 한국 육군에 투항해 대한민국에 정착한 북한 육군 군관은 개전 직전에 소련군 군사고문단이 기존의 '훈련전담' 고문에서 '작전지휘' 고문으로 전부 교체됐음을 증언한 바 있다. 6.25전쟁 개전 직후 소련 군사고문단장 [[블라디미르 라주바예프]] 장군이 본국에 타전한 전문에 따르면, 개전 당시 북한군 각 부대마다 배치된 소련 고문관의 작전지휘는 훌륭했으나, [[38도선]]을 넘어선 뒤부터 소련 고문관이 동행하지 않으면서, 일부 부대의 경우 사령부와 48시간 이상 교신이 두절될 정도로 북한군의 작전은 매우 형편없어졌다고 한다. 물론 소련이라고 해서 좋아서 이랬던 것은 아니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큰 피해를 입고 전쟁기 미국의 막강한 국력을 목격한 스탈린 입장에서 6.25 전쟁 개입을 대놓고 선언했다간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져 또 다시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부러 전쟁 개입을 소극적으로 했던 것이었다. 물론 미국도 마찬가지로 만주에 원자폭탄 투하를 운운하며 확전을 주장한 [[맥아더]]가 해임된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이기도 했다. 소련의 [[위성국]]이 되어버린 이런 행태는 2차 대전 종전 후 소련의 [[위성국가]]가 된 여러 공산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으며, 이것을 피한 공산국가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티토]]가 장악한 [[유고슬라비아]]밖에 없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북한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상실된 것은 바로 소련이 북한의 지도자로 올려놓은 김일성이 [[8월 종파사건]] 같은 일을 벌이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면서 부수적으로 발생한 현상이다.[* 다만, 예외적으로 알바니아 같은 경우는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에 [[엔베르 호자]]가 반발하면서 사실상 독자노선을 걷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