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련군정 (문단 편집)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스탈린김일성초상화행진.jpg|width=100%]]}}}|| || {{{-1 {{{#f3c700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 그리고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는 북한 주민들'''}}}}}}[* 사진은 1946년 11월 평양음악학교 학생들이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서 경축대행진을 하는 모습이다. 소련군정 시기 내내 북한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으로 이와 같은 스탈린 개인숭배 분위기는 6.25전쟁 시기까지 이어지다 스탈린이 사망 후 소련에서 격하되고 김일성이 [[주체사상]]을 내세운 1950년대 중반에야 사라진다. 태극기의 경우 [[인공기]]를 국기로 지정하게 된 1948년까지 사용했다.] || '''소비에트 민정청''' 또는 '''소련군정'''은 [[8.15 광복]] 이후, [[한반도]] 38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 육군]]이 실시한 군정이다. 사실상 이 기간에 북한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반 치스차코프]]는 처음 포고문을 1945년 8월 24일 함흥에서 발표했다. 이는 함흥이 소련군이 가장 먼저 해방시킨 함경도 지역 중심 도시였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말기 육성된 대표적인 공업도시여서 일본 열도를 제외하고 동아시아에서 가장 산업화율이 높은 도시였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 중심지가 평양이라는 사실도 몰랐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주장은 아니다. 치스차코프도 2일 만인 26일 평양으로 이동해서 소련군 열병식과 소련군 환영 주민 대회를 열고 연설했다. 소련군이 조선으로 진격한 이유는 [[동북아시아]] 패권 확립에 있었다.[* 물론 소련은 일본과 달리 한반도를 직접 통치한다거나 그럴 구상은 없었다.] [[만주 작전]] 당시 [[만주국]]을 비롯, 만주지역 내 일본군 세력 괴멸이 소련군의 목표였다. 여기서 일본군 세력은 당연히 만주국 실질적 통치 주체나 다름없는 [[관동군]]이었다. 1945년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일본은 한반도 북위 38도선 이북을 관동군 위수지역으로 설정했고, 그 이남을 육군 17방면군 위수지역으로 변경했다. 소련군의 주력은 소만국경을 돌파하며 만주의 종심을 찔렀으나, 다른 한편으로 관동군의 위수지역인 조선 북부를 찔렀다. 이 과정에서 [[선봉구역|웅기]], [[청진시|나남]]을 [[소련 육군]]이 점령했다. 나남을 점령한 것은 [[소련 해군]]과 [[해군 육전대]]였다. 당장 [[김무정]]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내 조선인 [[연안파]]가 이제는 조선을 해방시키라는 [[린뱌오]]의 지시에 따라 [[조선의용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려 했으나 소련군에 의해 저지당하기도 했다.[* 소련의 입장에서 중국공산당과 연안파는 자신들의 영향권 밖에 있었으니 당연한 조치였다.] 이들은 결국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마찬가지로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다.[* 그런데 대부분은 중국에 그대로 남아 [[국공내전]]에 참전하다가 후에 북한에서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자 정식 군인 자격으로 귀환하여 합류한다.] 보통 [[미군정]]과 더불어 소군정이라고 부르지만, 당시 소련 입장에선 '''공식적으로는 민정''', 즉 민간 정부로 칭했다. 소련은 종전 후 독일 같은 [[추축국]] 본토에만 '군정'이란 말을 썼고, '''추축국에 점령됐다 해방시킨 지역'''([[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한반도]] 38선 이북 등)에서는 '민정'이란 말을 썼다. 단 명칭만 다르게 한 것이고 소련군의 한반도 북부 통치는 실질적으로는 군정이나 마찬가지 체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