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조실록 (문단 편집) == 내용 == [[http://sillok.history.go.kr/search/inspectionMonthList.do?id=kna|국사편찬위원회 선조실록 전문]] 실록의 정식 명칭은 선조소경대왕실록(宣祖昭敬大王實錄)이다. 1567년 7월부터 1608년 1월까지 선조 재위 40년 7개월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으로, 1609년([[광해군]] 1년) 7월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 11월에 완성하였다. 총 221권 116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나,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이후의 기록이 대부분이고 그전의 기록은 25권 12책에 불과하다. 즉, 1567년부터 1591년까지 약 25년간의 재위 기록이 임진왜란 이후 선조 사망까지 16년간의 재위 기록의 1/10 수준이다. 이는 임진왜란 이전에 작성된 사초들과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이 왜란의 전화에 홀랑 날아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선조 재위 초기의 자료들을 어떻게든 기록하려고 사대부들의 일기와 지방에 보관되어있던 조보(朝報)들을 악착같이 뒤져서 겨우겨우 기록한 것이 이 수준이다. 단적으로, 선조 재위 기간에 관측된 두 초신성인 SN 1572와 SN 1604의 기록을 비교해 볼 때 SN 1572는 기록이 아예 없지만(선조수정실록에는 딱 한 줄 기록되어 있다.) SN 1604는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요하네스 케플러|케플러]]가 남긴 기록보다도 더 상세할 정도이다. 이에 대해 선조실록에서는 [[일본군]]의 방화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선조수정실록]]에서는 당시 [[사관(역사)|사관]] 네 명이 사초를 불에 태우고 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관 조존세, 김선여, 임취정, 박정현 등이 도망하였다. 존세 등은 좌우 사관으로서 처음부터 호종하면서 침문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상이 자제처럼 대우하였다. 이날 밤 네 사람은 상이 요동으로 건너갈 것을 의논하여 결정하자 도망칠 것을 몰래 의논하고는 먼저 사초책을 구덩이에 넣고 불을 지른 뒤 어둠을 타고 도망하였다. 상이 길에서 자주 돌아보며 사관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는데 모두 보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자, 상이 이르기를, "김선여가 탄 말이 허약한데 걸어서 오느라 뒤에 처졌는가" 하였다. 새벽이 되어서야 그들이 도망한 것을 알고는 사색이 참담하였다. 따르는 자들이 모두 격분하며 매도하기를 '뒷날 상이 환국하시면 이 무리들이 어떻게 살아나겠는가' 하였다. 네 사람이 각각 영남과 호남 사이에서 가족을 찾았는데 주현에서 먹을 것을 구하며 핑계대기를 '상이 물러가라고 허락하였기 때문에 왔다'고 하였다. >---- ><<선조수정실록>> 25년 6월 1일[* 해당 사관들은 훗날 어찌어찌 관직 생활을 이어가긴 했으나 두고 두고 오명을 얻게 되었다. [[https://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1307302131465|#]]] 훗날 1641년([[인조]] 19년)에 기존의 선조실록이 잘못된 점이 많다고[* [[권율]], [[류성룡]], [[이순신]]등 S급 거물들은 까내리고, [[이이첨]]만 빨아준다(...).] 하여 [[인조]]가 이식에게 명하여 선조실록을 개수하게 하였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흐지부지되다가 1657년([[효종(조선)|효종]] 8년)에 [[선조수정실록]]과 [[선조대왕실록수정청의궤]]를 최종 완성하였다. 선조수정실록은 기존에 편찬된 실록을 개수한 최초의 사례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