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석륵 (문단 편집) === 전공과 출세 === 성도왕 [[사마영]]의 용병으로 활약하다가 패배하여 군사력과 근거지를 상실하자, 석륵은 307년에 한(漢)[* 훗날의 전조(前趙).]의 태조 광문제 [[유연(전조)|유연]]에게 항복했다. 유연의 휘하에서 여러 전공을 세운 석륵은 독자적인 병력을 이끄는 군단의 수장으로 출세했으며 유연이 붕어한 후 제3대 열종 소무제 [[유총(전조)|유총]]의 휘하에서도 활약했다. 석륵은 하북 및 하남 지역을 휩쓸고 다녔으며, 310년에는 한수를 건너 장강 유역까지 진격했다. 311년, 서진의 수도 낙양 공략에 참가하여 도망치던 태위 [[왕연]]의 무리 100,000명을 사로잡거나 죽였다. 원래 왕연은 동해왕 [[사마월]]이 분사하자 대권을 이어받은 자로 죽은 동해왕의 장례를 지낸다는 핑계로 동해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낙양에 있었던 사마월의 아들 등 황족, 대신, 부호, 백성, 낙양의 정병(...)[* 실제로 이 병력이 낙양에서 빠지는 바람에 훗날 낙양이 함락되는 원인이 되었다.] 등 10만여 명이 따라붙는 바람에 사마월의 관을 앞에 세우고 동해로 갔다. 이를 알게 된 석륵은 경무장한 기병을 이끌고 사마월의 관을 호송하던 이 무리들을 추격하여 고현 영평성에서 따라잡아 군사들을 죽이고 기병들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하니 사마월의 아들을 포함해서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영평 전투''') 다만 왕연, 양양왕 사마범, 임성왕 사마제, 무릉왕 사마담, 서하왕 사마희, 양회왕 사마희[* 서하왕 사마희와는 [[동명이인]]이다.], 제왕 사마초, 이부상서 유망, 정위 제갈전, 예주자사 유교, 태부장사 유애 등 사마씨 황족과 관료 48명은 생포했다. 석륵은 장막에 이들을 앉혀놓고 다음과 같이 논죄했다. >석륵: '''"그대들 나라(서진)가 이렇게 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왕연: "[[팔왕의 난|황족들의 내분]] 때문입니다. 다만 저한테는 책임이 없습니다. 저는 원래 젊어서 관직을 가질 생각이 없었고, 세상 일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친 김에 장군께서 존호를 칭하시면 제가 호응하겠습니다."[* 즉, 석륵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하고, 자신이 밀어줄 테니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다.] >석륵: '''"그대는 젊어서 조정에 들어가 그 이름이 사해를 덮을 정도였고[* 왕연은 당시 [[죽림칠현]]의 뒤를 이은 청담 세계의 영수였다.] 지금도 중요한 관직을 맡고 있는데 어찌하여 관직을 가질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가? 천하를 망친 것이 그대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석륵은 왕연을 끌어내게 했고, 이에 나머지 사람들은 두려워서 스스로 자신의 죄를 시인했다. 다만 양양왕 사마범은 겉모습과 정신이 엄숙하고 태연했으며 그들을 돌아보고 꾸짖었다. 이에 감탄한 석륵은 이들을 살려서 인재로 쓰려고 했지만 부장이었던 공장의 반대로 밤중에 사람을 시켜 흙담장을 무너뜨려서 48명을 모두 압사시켰다. 사마제는 죽기 전에 동해왕 사마월의 관을 열어 시체를 불태우며 말했다. >사마제: '''"천하를 망친 사람은 이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천하 사람들을 위해 보복하니 그 뼈를 불에 태워 천지에 알린다."''' 다만 사마월의 왕비였던 배씨는 어딘가로 달아나다가 사로잡혀 노비로 팔렸는데 탈출하여 장강을 건넜다. 그녀는 낭야왕 [[원제(동진)|사마예]][* [[동진]]을 건국한 중종 원황제로 [[사마의]]의 6남 사마주의 장손이었다.]를 만나 건업을 지키도록 권했으며 사마예도 그녀에게 은덕을 베풀었다. 결국 사마예는 자신의 3남 사마충을 동해왕 사마월의 양자로 삼아 동해왕으로 봉하고, 대를 잇도록 했다. 이후 석륵은 [[유요(전조)|유요]], [[왕미(전조)|왕미]], 호연안 등과 함께 결국 낙양을 함락시키고 회제 [[사마치]]를 사로잡았다. 낙양 함락 이후에도 황하 이남에서 약탈전을 지속했으며 석륵을 죽인 후 군대를 탈취하려고 모의하던 한족 장수 왕미를 [[역관광]]하여 죽이고, 오히려 그의 군대를 흡수했다. 본래 한족 출신이었던 왕미는 출세하여 천하를 얻기 위해 남흉노의 유씨가 세운 호한 밑에서 싸웠던 것이고, 그 때문에 낙양이 사통팔달이며 역대 왕조들의 유서 깊은 고도인 것을 들어 낙양에 수도를 정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유요는 이를 깡그리 무시하고 낙양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왕미는 흉노놈은 어쩔 수 없다며 욕을 했다. 왕미는 석륵을 죽이고, 그 세력을 흡수하여 천하를 도모할 계략을 세웠지만, 바보가 아니었던 석륵이 화친을 가장하여 접근한 후 오히려 왕미를 참했던 것이다. 석륵은 글씨를 읽을 줄 모르는 [[문맹]]이었지만 식견은 뛰어났고 휘하에 인재를 모으는 것을 좋아했다. 309년에 하북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선비들을 모아 '''군자영'''(君子營)이라는 부대를 만들기도 했다. 이때 등용한 [[장빈(후조)|장빈]](張賓)은 석륵의 1등 참모로 활약했다. 312년, 석륵은 수춘을 공격하려 했으나 장마로 인해 위기에 빠졌다. 이때 장빈은 석륵에게 약탈전을 그만두고 기주 지역에 거점을 만들 것을 건의했다. 석륵은 이를 따라 양국을 수도로 하여 하북 일대에 반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316년, 석륵은 자신의 세력권 안으로 쳐들어온 병주의 [[유곤(진위장군)|유곤]]을 격파하고, 병주 북부 일대를 차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