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재필 (문단 편집) === 광복 이후 === >한국이 통일되는 그 날이 빨리 오게 하려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실천해야 한다. >---- >- 1947년 7월 1일 입국 인사 1945년 [[8.15 광복]] 이후 [[미군정]]의 초청으로 고문 자격으로 입국했다. ||<-3>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br]-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1호 - || || 순위 || 이름 || 득표율 || || 1위 || [[여운형]] || 33% || || 2위 || [[이승만]] || 21% || || 3위 || [[김구]] || 18% || || 4위 || [[박헌영]] || 16% || || 5위 || [[이관술]] || 12% || || 6위 || [[김일성]] || 9% || || 7위 || [[최현배]] || 7% || || 8위 || [[김규식]] || 6% || || 9위 || '''서재필''' || 5% || || 10위 || [[홍남표(1889)|홍남표]] || 5% || ||<-3> {{{-2 백분율의 합이 100%를 넘는 것은 복수 응답이 있었기 때문임[[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eongpansa&logNo=222216816107&navType=by|출처]]}}} ||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하였으나 당시 서재필은 국적이 미국이었기 때문에 피선거권이 없었다. 본인도 대통령 자리에 큰 미련이 없었고, 정세와 고령[* [[이승만]]보다도 무려 10살이 많았다.] 문제로 인해서 출마할 생각도 없었다고 한다. 이때 라디오 방송 연설을 영어로 했다고 한다. 그래도 지지자가 없지는 않았는지, 국회에서 간선으로 실시한 제1회 대통령 선거에서 무효표가 되긴 했지만 1표를 얻긴 했다. 그러나 어쨌든 서재필의 고사로 인해 [[이승만]]과 서재필을 경쟁시키려는 미국의 계획은 틀어졌고, 이는 이승만이 이후 대통령에 한결 편하게 오르는 기회가 된다. 그래도 보은격으로 [[김규식]]에 이어 조선적십자사 2대 총재 자리에 오르게 되지만 곧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1951년 사망했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5> [[파일:781_780_728.jpg|width=80]] '''조선 적십자사 역대 총재''' || || 초대 [[김규식]] || {{{+1 →}}} || '''2대 서재필''' || {{{+1 →}}} || [[대한적십자사]] 설립, 초대 총재 [[양주삼]] || 사망 후 [[필라델피아]] 공동묘지 납골당에 안치된 서재필과 그의 아내 유골은 돌봐주는 이가 아무도 없어 묘지 관리인이 주인 없는 유골인 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수십년째 방치되고 있었다. 이를 1983년 현지 교민 장익태 씨와 서재필 친형의 증손자인 서동성 씨가 사비 2천 달러를 들여 좀 더 좋은 납골당으로 이장해 관리하기 시작했다. 서재필은 독립운동으로 활동하느라 모아둔 재산이 없이 가난하게 살았으며,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둘째 딸도 한겨울에 난방도 못하고 살만큼 궁핍했다고 한다. 생전에 딸을 둘 두었으나 장녀와는 사이가 소원했는지 장녀에게서 난 손자(93년 당시 70세)는 아주 오래 전부터 연락이 두절되었고, 차녀는 독신으로 사망해 사실상 혈육이 없는 것과 같았다. 차녀 뮤리엘은 사망하기 전 서동성에게 “아버지의 유골을 한국으로 모셔달라”며 울면서 부탁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https://www.hankyung.com/news/article/1993070600041|#]] 1994년에는 그의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봉환되어 그해 4월 8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외증손 이상호 씨가 유해를 운구했다.[* 이상호 씨는 [[노무현 정부]]에서 지방자치단체 국제화재단 이사장으로 임명되었는데, 후임 [[이명박 정부]]로부터 임기가 남았음에도 사퇴를 요구받아 갈등을 빚었다. 이씨는 서재필의 유해를 운구할 당시 "내가 죽은 다음에 나쁜 놈, 더러운 놈 소리 듣지 않도록 해야겠다 생각했다"며 당시의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14134|#]] 외증조부에 대한 엇갈린 평가를 염두에 둔 말인듯.]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