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울대학교/학부/법과대학 (문단 편집) == 여담 == * 고시 합격자를 상당히 많이 배출한 학과이지만, 정작 '''고시 공부에 대한 지원이 전무'''에 가까운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어느 재학생 사시 합격자는 합격기에다 '고시 공부를 도와 주기는커녕 오히려 방해를 하는 듯한 서울 법대'라고까지 대놓고 적었을 정도. [[고시반]] 같은 것은 당연히 그런 거 없다. 법학도서관에 수험서를 비치해 주고[* 이마저도 도서관의 역할상 당연한 일이었다.], 열람실을 마련해 주고, 학기를 좀 일찍 마쳐 주는 것 정도가 고시에 대한 지원 아닌 지원이었다. 행정법학자인 모 교수의 경우는 정도가 더욱 심해서, 사시 2차 준비 중인 대학원생들도 블록 세미나에 끌고 갈 정도였다. 교내에서 하루 종일 하는 블록 세미나면 그나마 양반이고, 심지어 자기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에 학생들을 데려간 적도 있다. 그렇게 학생들 고시 공부를 방해하는 이유가 걸작인데, [[내가 해봐서 아는데|자기도 대학원 다니다가 사시에 합격했기 때문]]이라고.[* 사실 이런 점은 법대뿐만 아니라 [[서울대학교]] 여러 학과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났던 현상이다. 예를 들어 사범대학의 경우도 임용시험에 대한 지원이 없는것은 물론 학과 졸업논문 제출은 스케줄대로 해야 했다. 즉 4학년의 경우 졸업논문 준비와 임용시험 준비를 동시에 해야 하는 것. 공대 등 이과계 학과도 마찬가지라 다른 대학처럼 4학년은 입사시험 준비하라고 강의를 빨리 마무리하라는 등의 배려가 없었다. 최근 들어서 조금씩 이런 점은 바뀌어 가고 있긴 하다.] 2000년대에 가서야 '가이우스 프로그램'이라는 사법시험 모의고사반을 만들었는데, 학생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응시는 해 보지만, 역시나 거기서 출제된 문제는 예상 문제에서 제끼게 된다."라는 말까지 할 정도로 평이 좋지 않았다. 어쨌거나 문제의 고시반 아닌 고시반은 법대가 로스쿨로 바뀌고 난 지금도 남아 있다.[* [[정종섭]] 교수의 주도로 만들게 되었다고 하는데, 법대만의 모의고사반이어서 졸업생은 응시할 수 있으나 타과 출신은 참여를 불허하였다. 가이우스(Gaius)는 [[고대 로마]]의 법학자 이름인데, 매우 개그스러운 사실은, 가이우스라는 사람은 시쳇말로 사법 시험에 못 붙어서 지방대 법대 교수를 하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 고시 합격자 발표가 나더라도 축하 현수막을 붙이는 등의 일은 전혀 없었다. 이는 법대만의 현상은 아니고 [[서울대학교]]의 공통적인 현상인데, 그런 짓을 하는 것 자체가 남사스럽다고 여기는 게 교풍 아닌 교풍이기 때문이다. 괜히 다른 학교를 자극한다는 인상, 즉 너 잘났네 하는 인상을 받을까봐 쉬쉬하는 게 있다.[* 법대에서 합격자 축하연을 열어 준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정작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의 반응은 합격자와 불합격자를 불문하고 [[이뭐병]]에 가까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원체 [[서울대학교]] 자체가 모교 부심이 아예 없기로 악명 높아서 졸업생 성과에 아예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고, 별 거리낌 없이 출신 학교 이름을 밝히는 타대학 출신과 달리 서울대 학생들은 그냥 "저기 과천 어딘가에 있는 산기슭에 있는 학교" 다닌다는 소리로 때워버린다. 다만, 동창회보에는 합격자 명단을 실어 줬는데, 기이한 것은 [[우리들 가운데 스파이가 있는 것 같아|공식적으로는 알 수 없는 합격자의 한자 성명과 졸업 기수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파악해서 게재하였다는 것.]] * [[박정희 정부]] 때에는 워낙 학사운영이 파행하다 보니, 학생들이 [[교가/대학#s-2.22|서울대학교 교가]]를 다음과 같이 패러디하여 자조했다고 한다.[[https://blog.naver.com/lsb8666/10075991391|#]] >가슴마다 엉큼스런 야심을 품고 >육법전서 맡겨놓고 외상술이다 >고등고시 핑계 삼아 연애만 하니 >부모님과 애인에겐 크나큰 고통 >날고뛰는 농땡이들이 다 모여들어 >오늘 휴강 내일 종강 서울법대다 *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로마법]] 전임교수가 있는 학교이다. 박사과정에서 로마법을 전공한 교수 자체는 전국적으로 몇 명 있으나, 대체로 로마법이 아닌 [[민법]] 과목 담당으로 되어 있다. 최병조 교수(재직기간 : 1985년 3월~2018년 2월)가 정년퇴임한 후 한동안 공석이었으나, 2023년 2학기에 이상훈 교수가 부임한다.[[https://www.lawtimes.co.kr/news/189810|#]] * 동창회에서 1994년에 《진리는 나의 빛》,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라는 동창생 수상록을 간행한 바 있다(현재 절판). 갓 고교 졸업한 신입생이 읽으면 '훌륭한 선배님들이 좋은 말씀 해 주시는구나'라는 감상이 들게 하는 글들이지만, 정작 필진의 상당수는 출세하기는 했지만 안 좋은 쪽으로 유명세를 떨친 이들이다. [[김기춘]], [[행불상수]] 등... * 최종고 교수가 2013년 정년퇴임을 맞으면서 《서울법대시대: 내가 본 서울대 반세기》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저자의 주관이 상당히 들어가 있지만, 서울 법대의 이모저모에 관한 매우 상세한 보고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1990년대 이후에 관해서는 보고가 매우 부실하다. * [[구조신호 시그널]] 19화(2018년 4월 6일 방영)에 1946년생([age(1946-01-01)]세) 김기두(金基斗)라는 서울대 법대 출신 [[고시 낭인]]이 나왔다. 고시촌에서 일정한 직업도 없이 50년을 살면서 지하철 행상을 하고 있다. 재수해서 [[서울대학교]] 법학과 66학번으로 입학한 직후 [[사법고시]] 준비를 시작했고 김기두 본인의 말에 의하면 [[영어]]를 아주 잘해서 1차 시험은 무난히 통과했지만 2차 시험에서 계속 낙방했고 끝내 합격하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계속 병역을 연기하다가 거의 30살 가까운 나이에 [[이등병]]으로 입대한 후 30살을 넘기고 [[상병]]으로 만기전역했다.[* 공교롭게도 '''[[노무현]]'''이 김기두와 동갑이고 상병전역도 같은 시기에 했지만 그는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았다.] 그리고 1978년 결혼했는데 배우자는 아마 서울법대라는 무지막지한 학벌에 혹한 듯하다. 하지만 아이를 2명(누나와 남동생)이나 낳고도 가족 부양을 전혀 하지 않고 사법고시에만 매달리다 보니 참다 못한 배우자가 이혼소송을 걸어 1982년 [[이혼]]했다. 이후 가족들과 단절되어 평생을 고시원에서 살았다. 김기두의 아들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 무슨 아버지냐'''라며 김기두를 아버지 취급조차 하지 않는다. [[지하철]]에서 칫솔장사를 하고 사는데 '''때가 안 나오니까'''라며 [[목욕]]을 아예 하지 않기 때문에 몸에서 악취가 나서, 승객들이 칫솔을 거의 안 산다. 김기두의 주 수입은 자신의 대학 동기생들이 [[변호사]]로 있는 [[로펌]]들에서 '평화 성금'이라는 명목으로 받는 구걸이다. 반응은 제각각인데 [[비서]][* 대형 로펌 변호사에게는 각자에게 개인 비서가 딸려있다.]에게 자신은 출근을 안 한다고 전하라고 하면서 기피하는 동기생도 있는가 하면 반면 [[노턴 1세|재미삼아 3만 원씩 주는 동기생도 있었다.]] 김기두가 진짜 서울대학교 법학과 출신인 것을 증명하듯 구조신호 시그널의 제작진에게 자신의 대학 동기생들이라는 사람들의 이름을 말했는데 [[박세일]], [[안경환]], [[양건(1947)|양건]], [[양승태]] 등등... '''원로 법조인들'''이 즐비했다. [[반지]]에 집착해서 손에는 [[반지]]를 몇 개씩 끼고 다니는데 잘 때도 [[반지]]를 벗지 않고 24시간 365일 반지를 항상 착용하고 사는 탓에 손가락이 [[반지]]로 인해 변형이 생겼다. 보다 못한 구조신호 시그널의 제작진은 김기두에게 [[목욕]], 낡은 [[가발]] 교체, [[반지]]로 망가진 손의 정밀검사 등을 시켜주겠다고 제안했으나 그는 자신의 방을 청소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왕년의 거물 정치인 [[박찬종]][* 5선 국회의원, 1992년 대통령 후보(4위 낙선), 1995년 서울시장 후보(2위 낙선)]까지 직접 김기두를 찾아와 설득하지만 김기두가 박찬종에게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일갈했다. 이 사람이 무너진 결정적 원인은 군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군대는 무학도 현역병 입영 대상이었으므로 온갖 종류의 저학력자들이 넘쳐나는 곳이었고, 서울대 출신들은 질시를 받아 남들보다 심한 구타 가혹 행위에 시달리는 일이 많았다. 실제 [[최영오 일병 살인 사건]]의 범인인 최영오 역시 단지 서울대학교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중졸 출신의 고참으로부터 모진 가혹 행위를 당하다가 그 고참병을 살해했다. 게다가 김기두가 입대한 나이가 28살 또는 29살 정도였을 텐데 문제는 '''무학이나 초졸, 중졸의 경우 18살이 되자마자 입대하기 때문'''에 10살 이상 나이가 많은 데다가 서울대 법학과 출신인 후임병이기까지 했으니 그 질시는 극에 달했음이 분명했다. 참고로 2021년 12월 기준 아직도 지하철에서 물건 팔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