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도세자 (문단 편집) === 극심한 정신질환과 연이은 살인 === >世子戕殺中官內人奴屬將至百餘而 烙刑等慘忍之狀不可勝言 >세자가 죽인 중관, 내인, 노속이 거의 100여 명에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했다. >---- >대천록(待闡錄)[* [[정조(조선)|정조]] 때의 학자 박하원이 사도세자 사건에 관한 일을 정리한 책. <천유록>이라는 제목으로 지은 후 정조에게 올렸는데, 정조가 읽고 제목을 <대천록>으로 고치게 하였다.]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였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했다. > >이 아래 1장은 세초되었다. 병신년 전교로 인해 세초했다.[* [[승정원일기]] 사도세자 부분에 자주 나오는 문구. 승정원일기에서 사도세자의 행동이 100여 곳 이상 찢겨 나갔는데, 정조가 삭제한 것이다.[[https://www.itkc.or.kr/bbs/boardView.do?id=75&bIdx=17177&page=1&menuId=128&bc=7|#]]] >---- >[[승정원일기]]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가서, 좌의정·우의정이 입시했을 때에 하교하기를 "이제 세자의 하령을 보니, 슬프고 가엾음을 어찌 비유하겠는가? 여섯 사람에게 판(板)을 주고 베를 주어, 해부의 관원으로 하여금 간검(看檢)하여 매장하게 하며, 그 처자(妻子)는 후하게 돌보아 주어 자신에 한하여 복호해 주라."고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 >1757년 6월부터 경모궁의 [[홧병]]이 더해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때 당번 내관 김한채를 먼저 죽이셨다. 그 머리를 들고 들어와 내인들에게 효시하였다. 나는 그때 사람 머리 벤 것을 처음 보았는데, 흉하고 놀랍기가 이를 데 없었다. 사람을 죽인 후에야 마음이 조금 풀리시는지 그날 내인을 여럿 죽였다. - [[한중록]]의 기록 1757년 6월 어느 날 하루에 내시와 나인을 6명 살해했다.[* 참고로 1757년 6월은 적모인 [[정성왕후]]가 사망한지 6개월도 안되었고, 적조모인 [[인원왕후]]가 사망한지 불과 3개월 정도밖에 안지난 시점이다. 이들이 죽은지 얼마 안되어서 사도세자가 살인행위를 시작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사도세자에게 정성왕후와 인원왕후의 존재는 매우 컸다는 것.] 세자 주변 내시, 나인, 종 등 사람을 죽이고 낙형으로 고문하기 시작했다. [[승정원일기]]의 내용이 삭제되었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기록은 대부분 [[한중록]]에 적힌 것이다. 원래 사서를 수정하는 것은 극악한 폭군들이나 하는 행동이다. 정조는 후대에 악평을 받을 것을 각오하고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기록을 삭제했다. 사관들이 저항했다는 기록이 따로 없는 것으로 보아 승정원일기 속 사도세자의 내용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니라 누구를 고문하여 죽이고, 누구를 고문하여 죽이고 이런 내용의 반복이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옷 입기를 어려워하는 [[강박장애]]인 [[의대증]]을 가지고 있었다. 옷 1벌을 입자면 10벌에서 20~30벌을 지어 올려야 했다. 세자는 옷을 입기 전에 옷이 [[귀신]]인지 아닌지 걸어 두거나 불사르기도 하는 등, 1벌을 순(純)하게 갈아입는 적이 없었다. 온갖 난리를 치며 가까스로 옷 1벌을 입으면 옷이 해지도록 그것만 입고, 본인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세자의 시중을 드는 나인들을 폭행하거나 죽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렇게,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되니 나인들과 내관들이 무서워서, 아니 '''살기 위해서''' 세자의 옷 입기 시중을 기피하게 되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세자빈인 [[혜경궁 홍씨]]가 세자에게 의복을 갈아입히는 일을 맡았다. 하지만 그런 혜경궁조차 [[영조]]에게 제대로 얘기를 못했다며 세자가 던진 [[바둑판]]에 맞아 '''눈알이 빠질 뻔 했다!''' 이 사건으로 홍씨는 며칠 동안 앞도 못 보고 바깥 출입을 못할 정도로 흉하게 부은 눈으로 있어야 했다. 결국 세자가 가장 사랑하는 [[후궁]] [[박빙애]](경빈 박씨)가 세자의 옷 시중을 들었는데, 1761년 1월 옷 입기 시중을 들던 중 세자가 빙애를 '''때려 죽였다.'''[* 박살(搏殺)은 맨 손으로 때려 죽였다는 뜻이다.] 세자는 빙애가 낳은 아들 [[은전군]]을 들어다 '''연못에 던진 적이 있다.''' 야사에 갓 돌 지난 아기였던 은전군은 그대로 죽을 뻔했지만, 의붓할머니인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 측근의 호위병들이 뛰쳐나가 꺼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경언]]이라는 사람이 세자 주변 사람들이 숨기려던 세자가 빙애를 죽인 일과 여러 일을 영조에게 고했다. 영조는 무엄하다며 나경언을 다음날 사형시켰다. 영조는 다음과 같이 세자를 혼냈다. >[[박빙애|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 >[[http://sillok.history.go.kr/id/kua_13805022_002|《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5월 22일 을묘 2번째 기사.]] 세자는 나인을 때려서 피가 철철 흐르는 상태로 곁에 두었다. '의관(衣冠)을 갖추면 아버지를 찾아 뵈러가야 한다'는 사고가 강박증으로 발현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영조에게 심한 질책과 핍박을 받은 나머지 정신이 크게 피폐해진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큰아버지인 [[경종(조선)|경종]]은 그나마 나아서 생모([[희빈 장씨]])가 사사되기 전까진 숙종의 총애를 받았고 사사 이후 아버지가 싸늘하게 변하여 행동도 조심해야 했지만, [[숙종(조선)|숙종]]도 [[영조]]처럼 노골적으로 [[경종(조선)|경종]]을 학대하진 않았다. 질책이 일시적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변하고 어릴 때부터 받아온 학대의 규모를 보면 세자의 강도가 더 심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6/15/2007061500165.html|당시 기록들을]] 보면 이러한 사도세자의 황폐해진 정신상태가 확실하게 드러난다. >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鬱火)의 증세가 있는 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긴장돼)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함께 말할 수 없습니다. [[홍봉한|경]]이 [[항우울제|우울증을 씻어내는 약]]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면 어떻겠습니까.(1753년 또는 1754년 어느 날) >“[[청심환|이번 알약]]을 복용한 지 이미 수일이 지났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습니다"(1754년 10월 또는 11월 추정) >나는 한 가지 병(病)이 깊어서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민망해할 따름입니다. ―1756년 2월 29일 21세 때 사도세자의 편지 >나는 겨우 자고 먹을 뿐, 허황(虛荒)되고 미친 듯합니다. >웃대궐을 수구(水口)로 가옵신다 하야, 가시다가 못 가옵시고 돌아오시니 이는 윤 5월 11일 ~ 12일 간이라. 그러할 즈음에 황망한 소문이 보태어서 아니 나리오. 낭자자(狼藉藉)하니 앞뒤로 일이 다 본심으로 하옵신 일이 아니건마는 인사나 정신을 놓으셨을 때는 화를 내시며 하시는 말씀이 "병화(兵火)로 어떻게 할까보다", [[암살|검을 끼고 가 어떻게 하고 싶다]] 하오시니 한푼이라도 상정(想情)이 있으시면 어찌 이러시리오. > 『[[한중록]]』 그 외에 [[영조실록]]에 의하면 사도세자가 외모나 생각, 됨됨이가 고조부인 [[효종(조선)|효종]]과 매우 닮았다고 한다. 일단 덩치가 어지간한 장수들보다 훨씬 큰 것부터, 문(文)보다 무(武)를 더 좋아했다고도 하며, 위에서 서술했듯이 어릴 때부터 총명하기로 소문났다. 이보다 좀 더 후대의 기록인 [[고종실록]]에서는 그를 일컬어 "얼굴에 표정이 없고 엄숙(嚴肅)하여 신하들이 영조보다도 더 두려워했으며, 백성에게는 자애(慈愛)로웠다"고 한다. 실제로 세자가 [[평양부]]로 갔을 당시 백성에게 신경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국방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도 함께 언급되어 있다. 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볼 때, 아버지의 학대로 인해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질환을 앓았을 가능성은 크다. 외방에 나가면 스트레스의 원인인 [[영조]]에게서 멀어졌다는 해방감에 정신 이상 증세는 완화될 수 있고, 지방에 사는 관리들과 백성들이야 세자에게 [[강박관념]]이나 위협을 주는 대상이 아닌 만큼 너그럽게 대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2014년]]에는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서울아산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이 [[한중록]]을 분석한 결과, "한중록의 내용을 볼 때 사도세자는 [[양극성장애]](조울증)의 증상에 해당하는 모습을 보이고, 이는 현대의 정신건강의학 지식이 없이 허구로 지어냈다고 보기 어렵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한중록에 나오는 사도세자의 묘사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연구 결과다. (본문에서 인용한 글의 Lee DI은 물론 '[[이덕일]]'을 의미한다.) 양극성장애라면 기분 [[삽화]] 사이 사이에 정상적인 정신건강상태를 회복하는 기간도 있기 때문에 사도세자가 광증을 보이면서도 때때로 정상적인 판단을 했다는 기록과도 모순되지가 않는다. >"[[한중록]]은 사도세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친정 홍씨 집안을 방어하기 위해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 사후에 기록한 것이므로, 내용이 왜곡되었을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사도세자는 당쟁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Lee DI. The world dreamed by Prince Sado. Goyang: Wisdomhouse;2011. p.53-54.) 하지만 [[한중록]]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신병적 증상에 들어맞는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정신 증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순전히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술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접근 가능한 역사적 자료의 양이 부족하여 자료 수집에 제약이 많았고, 이로 인해 근거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연구의 가장 큰 제한점이다. 또한 연구자가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1차 자료에 직접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중록]]을 살펴보면 증상에 대한 기술이 상당히 상세하고 구체적이어서, 현대의 정신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허구로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 [[https://pdfs.semanticscholar.org/5b47/ae0ec3c51c0d7dcfe7866bd9ed869efed944.pdf|해당 논문]] 9페이지 역사학자들이 아닌 의대 교수들이 보아도 한중록에 기록된 사도세자의 정신질환 증상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최소한 사도세자가 사람을 죽였을 당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였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했다를 놓고 보았을 때,기분이 양극성장애 I형과 양극성장애 II형의 구분이 어려울지 언정 [[조증]]과 [[우울증]]을 왔다갔다 했거나 혼재성 삽화일 때 궁비와 환시를 죽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조증은 [[병식]]을 인식하기 매우 어렵다. 또한 [[평안도|관서]]행과 [[임오화변]] 당시 [[http://ko.wikipedia.org/wiki/나경언|나경언]]의 고변 내용을 보면, 세자는 유람과 사치에 열중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자는 연회와 아랫사람들에게 주는 하사품 구입 등에 많은 돈을 썼고, 이 때문에 세자궁(동궁)의 예산이 텅텅 비어서 시전 상인들에게 많은 돈을 빌려야 했다. 나중에 이를 안 영조는 세자한테 크게 화를 내며 질책하고, 국고로 상인들에게 돈을 갚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