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도세자 (문단 편집) === [[대리청정]]과 이후 === 한편 [[영조]]는 자신이 왕위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서, 또는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매우 자주 [[선위]] 파동을 벌이곤 했다. "자꾸 신하들이 말 안 듣고 노골적인 당파 싸움(붕당 정치)만 하니까 왕 노릇 못 해 먹겠다. 이게 다 내가 부덕한 탓이니 왕 때려 치울란다."라는 내용으로 난리를 쳐서 [[노론]]ㆍ[[소론]] 신하들에게 "한 번만 더 저희가 당파싸움을 하면 저희를 벌하소서."란 맹세를 받아내는 식이었다. 왕이 선위한다고 하면 신하와 세자가 일단 "아니 되옵니다!!!"라고 격렬히 반대, 또는 뭘 잘못했는지 몰라도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싹싹 비는 모양새를 취해야 했다. 왜냐하면 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다른 왕을 세운다는 건, 그 다른 왕이 지금의 세자라 할지라도 '''금상(今上)에 대한 역모 및 반역'''이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도세자는 조선에서 가장 [[석고대죄]]를 많이 한 인물로 추정된다.[* 비슷하게 [[태종(조선)|태종]]도 세자였던 [[양녕대군]]에게 선위를 하겠다고 쇼를 한 적이 2번 정도 있었다. 하지만 [[세종(조선)|충녕대군]]을 새로 세자로 책봉한 직후 3번째 양위 파동 때는, 세자와 신하들의 반대에도 진짜로 충녕대군에게 양위를 한다.] 사도세자가 2살 때 벌인 선위 파동이야 2살짜리에게 책임이 돌아갈 순 없었으니 별 일 없었지만, 사도세자가 15세 때 벌어진 영조 25년의 선위 파동은 "선위가 싫으면 [[대리청정]]이라도 시켜라. 그것도 싫으면 그냥 선위하겠다."고 영조가 막나가는 바람에 선위보단 한 단계 낮은 대리청정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것이 희대의 비극의 시발점이 된다. [[영조]]의 대리청정은 이름만 [[대리청정]]이지, 실제론 왕권 강화를 위한 쇼에 불과했다. 이 대리청정을 들어서 영조가 사도세자를 믿고 대리청정을 시켰다는 서술이 과거에는 많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고, '''영조는 왕의 일을 세자에게 맡길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당장 정사를 보기 시작한지 달포가 안 되는 영조 25년(1749년) 2월 16일에 바로 영조의 의도가 드러난다. [* 후술할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세자가 직접 일을 해결하면 아직 왕도 아니면서 왜 맘대로 결정하냐며 갈구고, 물어보면 이런 것도 혼자 못 처리하냐며 갈구는 식이었다.] ||영조: "오늘은 곧 원량(元良)[* 세자, 세손, 세제 등 차기 왕위 후계자를 다르게 일컫는 표현이다.]이 시좌하여 처음으로 정사를 여는 날이다. 품달[* '웃어른께 여쭈어보다'는 뜻. 즉 결정하기 전에 세자에게 먼저 여쭈고 결정하라는 뜻이지만, 역시나 쇼였다.]하여 결정할 일이 있으면 원량에게 품달하라.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나는 앉아서 지켜보고자 한다.]]''' (사도세자에게) 무릇 여러 신하들이 아뢰는 일에 대하여 만약 ‘그렇게 하라.[依爲之.]’라는 3글자로써 미봉적으로 대답한다면 반드시 잘못을 저지를 우려가 있다.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반드시 대신에게 묻고 자신의 의견을 참작한 뒤에 결정하라." 영의정 김재로: "[[함경북도]] [[김책시|성진]][* [[함경북도]] [[성진시]]. 이 때 성진은 [[길주군|길주]] 산하의 읍면이었다. [[대한제국]] 시절인 1904년([[광무]] 8년)에 길주군에서 분리되었다가 1943년도에 시로 승격된 것. 북한에서는 김책시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방영[* 각 도의 요지를 방어하는 방어사가 근무하던 방영.](城津防營)은 도로 [[길주군|길주]](吉州)에 소속시키는 것이 편리합니다." 좌의정 조현명: "[[육진]](六鎭)으로 통하는 길은 모두 9갈래가 있는데, 길주는 요충에 해당하지만 성진은 단지 3갈래 길만 막을 수 있습니다." 사도세자: "방영(防營)을 비록 길주에 도로 소속시키더라도 성진에 역시 군졸이 있는가?" 김재로: "진졸(鎭卒)[* 지역 군영에 있는 병사들.]이 있습니다." 사도세자: "그렇다면 방영을 [[길주군|길주]]로 옮기는 것이 옳겠다." 영조: "''''네 말이 비록 옳기는 하다만 당초 방영(防營)을 성진으로 옮긴 것은 이미 나에게서 나온 것인데, 길주로 다시 옮기는 것은 [[개소리|경솔하지 않느냐?]] 의당 먼저 대신에게 물어 보고, 또 [[일구이언|나에게도 품(稟)한 뒤에 시행하는 것이 옳다.]]'''"|| 결국 영조는 이 문제를 '''자기가 알아서 처리한다'''. 지켜보겠다고 하던 영조가, 첫날부터 자기 말을 대놓고 어긴 것이다. 거기다 세자가 한 결정이 틀린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세자가 처리한 방향이 옳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영조가 화를 낸 이유는 단지 '''자기가 한 걸 마음대로 바꿨다는 이유였다.''' 거기에 영조는 길주ㆍ성진의 병영 배치 문제를 자신이 직접 그대로 주관한 다음에 또 질책해서 사도세자의 기를 죽이는 발언을 한다. >"너는 깊은 궁중(宮中)에서 태어나 안락하게 자랐으니 어떻게 임금 노릇하기가 어려운 줄을 알겠느냐? 지금 [[길주군|길주]]에 관한 한 가지 일을 보니 손쉽게 처리해 버리는 병통(病痛)이 없지 않다. 나는 한 가지 정사와 한 가지 명령도 감히 방심하여 함부로 하지 않았고, 조제[* 중재]에 고심하여 머리와 수염이 모두 허옇게 되었는데, 25년 동안 서로 살해한 적이 없었으니 너는 이를 금석(金石)처럼 지킴이 마땅하다. > >임금이 신하를 부리는 도리는 그들을 모아서 쓰는 것이 옳겠느냐? 분리해서 쓰는 것이 옳겠느냐? 저 여러 신하들은 그들의 선대를 따져 보면 모두 혼인으로 맺어진 서로 좋은 사이지만, 당론이 한번 나오게 되자 문득 [[초(춘추전국시대)|초(楚)나라]]와 [[월나라|월(越)나라]]처럼 멀어져 각기 서로 해칠 마음을 품었으니, 내가 고집스럽게 조제(造製)에 힘쓴 것은 단연코 옳은 것이다. 지금 진언하는 자들이 혹자는 말하기를, ‘조제하는 것이 도리어 당파 하나를 만들었다.’ 하고, 혹자는 ‘조제하는 것이 도리어 편협하다.’ 하며, 혹자는 ‘현명하고 어리석은 사람과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등 그 말하는 바가 천만 갈래로 나뉘었다. 비록 감히 서로 살해하지는 못했으나, 서로 살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던 적이 없었다. > >오늘부터 네가 만약 신하들이 아뢰는 대로 듣고 믿어서 시원스럽게 그 말에 따르기를 지금 길주의 일과 같이 한다면, 그 결과 종묘사직과 신하와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한쪽은 나아가고 한쪽은 물러남이 겉으로는 시원스럽게 보이지만 당쟁을 열어 놓게 되는 것이니, 네가 이 명을 지키지 않으면 뒷날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겠느냐? 400년 조종(祖宗)의 기업과 한 나라의 억만 백성을 너에게 부탁하였으니, 너는 모름지기 나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겨 기대를 저버림이 없도록 하라." 특히 위에서 영조는 반드시 '대신에게 묻고' 자신의 의견을 참작하여 결정하라고 했고, 사도세자는 그렇게 했다. 그런데 "방영의 일을 마음대로 정했다"고 나무라는 이 대목에서는 손바닥 뒤집듯이 "신하들이 옛날부터 혼맥 등으로 연결돼 사이가 돈독해 보여도, 실은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와 [[월나라]]의 지간처럼 철천지 원수들이라 틈만 나면 물어뜯기 바빠. 네가 신하들 하는 말을 곧이 들어주는 게 일단 시원스러워 보여도, 그렇게 어느 한 쪽에 힘을 실어주고 뺏고 하다보면 당쟁의 빌미가 된다. 나는 25년 동안 신하들 중재를 게을리한 적이 없는데 네가 나처럼 안 하고 방금처럼 니 멋대로 하다 나중에 사고 터지면 무슨 낯으로 내 얼굴 볼래? 널 믿고 맡기는 건데 잘 좀 해라!"라고 한다. 이쯤되면 사도세자 입장에선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싶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사실 애시당초 목적이 그냥 갈구는 것이었으니 [[답이 없다|답이 없기는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세자가 마음대로 뭘 할 수 있었을까? 세자는 말만 [[대리청정]]이지 "알았다.", "안 된다.", "대조(大朝)[* 대리청정 중의 금상을 뜻한다. 반대로 대리청정을 하는 세자는 소조(小朝)라고 부른다. 따라서 대조는 영조, 소조는 사도세자가 된다.]께 물어보고 결정하겠다."라는 말들만 할 수밖에 없었다. 영조처럼 이렇게 신하들 앞에서 세자의 권위를 박살내는 건 세자를 견제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 입만 열면 욕먹는 세자를 신하들이 불쌍히 여길지언정 '윗사람'으로서 권위를 느낄 리는 없고 신하들도 임금을 좋게 볼수 없다. [[이덕일]]은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 친[[소론]] 성향을 보이자, 불안해진 [[노론]] 대신들이 영조와 세자 사이를 [[이간질]]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론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사도세자가 골수 소론이라도 친소론의 모습을 보일 수가 없다. 영조의 질책이 이렇게 사소한 것부터 시작됐는데, 세자가 사소한 걸 물어보면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고 화내며, 안 물어보면 "제멋대로 했다"고 화를 내는것이다. 그러니 가뜩이나 아버지를 무서워하던 세자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그 성질 더러운 [[숙종(조선)|숙종]]조차 아들 [[경종(조선)|경종]]의 대리청정 기간에 '''일부러''' 1시간이나 늦게 입시한 승지[* 그니까 왜 이랬냐면, 왕이 될 자질이 있는지 보는 일종의 테스트 같은 거라고 보면 되겠다.] 때문에 경종이 벌컥 화를 냈다가 곧 지나쳤음을 인정하며 입시시킨 일을 비망기(備忘記)로 책망했다가, 신하들이 "그렇게 뭐라 하실 일이 아닙니다"라고 지적하자 뻘쭘해한 일이 있었다. 하물며 영조는 신하들과 사도세자 사이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도, 그것도 단둘이 있을때 혼내거나 꾸짖는거면 또 모를까, '''훗날 세자가 즉위하면 신하가 될 대신들 앞에서''' 갑자기 불러다가 막말을 퍼붓고, 보다못해서 이를 말리는 신하에게마저 화를 내며 모욕하는 수준이었으니, 사도세자가 얽히면 군신관계에서의 조심스러움마저 안중에 없었다는 거다. 그 와중에 자기 권위 높이려고 선위하겠다는 둥 어쩌니 저쩌니 하면서 세자를 괴롭혀서, 세자가 눈물을 흘리며 혼절하고 궁인들에게 실려 나가는 일도 있었다. 보다못한 신하들이 "잘 하고 있는 세자를 왜 못살게 구세요?"라고 항의해도, 영조는 오히려 그들에게도 막무가내식으로 화를 냈다. 특히 세자를 옹호한 신하들 중엔 [[노론]] 대신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당파 싸움보다는 영조의 학대와 독단적인 결정이 더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려주는 방증이다. 애초에 [[영조]]가 사도세자를 틈만 나면 학대하는 모습은, 당파고 성향이고를 넘어 신하들 개개인에게 매우 부정적으로 비쳤다. 아무리 그 시절 부모들의 자식 훈육이 엄격했다고 한들, 자식이 뭔가를 잘못했거나 어리석은 행동을 저질렀을 때에만 엄격했던 것이다. 하물며 한 나라의 임금이 친자식에 가만 있던 세자를 갑자기 필요 이상으로 갈구는 꼴은, '''똑같이 자식 키우는, 그리고 누군가의 자식이었던''' 신료들의 입장에서도 보고 있기 힘든 모양새였다. 당파는 정치적 이익을 놓고 싸우는 거지, 사이코가 아닌 이상, 딱히 적을 만드는 성격도 아닌 어린 세자를 진심으로 증오할 일도 없었다. 솔직히 나이 지긋한 대신들 입장에서도 이제 15살 먹은 어린애가 잘못이 있든 없든 화부터 내고 보는 부모에게 하루가 멀다고 갈궈지니 보기 편했을까. 또한 영조가 아무리 갈궈댔다지만 사도세자는 엄연히 왕위 계승 서열 1위의 왕세자로, 사실상 영조의 외아들이라 경쟁자도 전무했고, 부왕의 사후 왕위 계승이 확실했다. 즉, 왕이 될 게 확실할 사람을 아무리 왕이 먼저 갈구고 있다지만, 신하 주제에 안 말리고 더 갈궈달라고 하는 건 자신의 목숨과 당파를 거는 도박수였다. 선위 파동과 관련해서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사도세자가 18살 되던 해 겨울, 궐내에 [[홍역]]이 돌아 세자를 비롯한 왕족 몇 명이 홍역을 앓은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의학]]이 현대에 비해 현저히 뒤처져 홍역은 거의 죽을 병이었는데, 영조는 [[대리청정]]을 잘못했다는 이유를 들면서 홍역으로 병석에 누워 있는 사도세자에게 질책을 했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홍역이 나은 지 불과 1달 된 쇠약한 몸으로 펑펑 내리는 눈을 사흘이나 맞으며 얼음장 같은 박석에 머리를 박고 푹 엎드려 있어야 했다. [[http://sillok.history.go.kr/id/kua_12811004_001|영조 28년 11월 4일]] 뿐만 아니라 영조는 "[[정성왕후|중전마마]]의 [[회갑]]에 하례(賀例)를 드리게 해 달라"는 김상로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정성왕후|네 엄마]]의 [[회갑]]이랍시고 [[패드립|하례까지 받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논지의 글을 써서 세자에게 보내는 등 정서적 학대까지 가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2811023_001|영조 28년 11월 23일]] 덧붙여 정성왕후의 하례를 못마땅하게 여긴 이유는, 영조가 정성왕후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사이가 나쁘며 냉대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평균 수명이 짧았기 때문에, 회갑은 '''대경사로 취급되었다.'''[* 조선 왕들 평균 수명이 40대 중후반이었다.] 그냥 시골 농부도 환갑을 맞으면 [[사또]]가 축하해주던 시대에, [[왕비]]가 회갑을 맞았는데 싫어한다고 저러는 건 상식 외의 미친 짓이었다. 더군다나 효가 근본인 조선에서 한 나라의 국부가 자신의 아내이자 국모에게 불효를 저지르라는 핀잔까지 주니 왕실의 위신도 깎이고 아들인 세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학대가 되고도 남는다. 하례를 드리러 가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아 불효가 되고 가지 않는다면 분명 어머니께 불효가 되니까. 실록에 따르면 영조가 양위 파동을 벌이자 김상로가 "눈보라가 치는 혹독한 추위에 필시 (세자의) 몸에 손상이 올 것인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신들은 비록 돌보아줄 것조차도 없지만 원량은 생각지 않으신단 말입니까?"라며 영조에게 대놓고 항의한다. 또한 영조는 양위 파동을 벌이기 3일 전 [[경종(조선)|선왕]]을 들먹이면서 대신들의 하례를 거부한 뒤, 송현궁으로 가서 환궁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에 김상로가 급한 마음에 "지금은 신이 한결같이 굳이 간쟁할 수만 없으므로 죽음을 무릅쓰고 명을 따르겠습니다"라는 말을 해서 겨우 영조의 마음을 돌렸다. [[사간원|대사간]] [[서지수(조선)|서지수]]는 이를 두고 "송현궁(松峴宮)[* [[정원군]]의 잠저.]에 가셨다가 환궁하지 아니하려 하실 때 김상로가 '일단 전하의 뜻에 따르겠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잘못됐습니다"라고 비판했다. [[http://sillok.history.go.kr/id/kua_12812005_001|영조 28년 12월 5일.]] 그러자 영조는 [[패드립|"서지수는 본디 괴상한 무리인데, 그의 아비와 할아버지부터 그러하였다"는 소리까지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2812008_001|영조 28년 12월 8일.]] 영조의 저 발언만 놓고 보면 마치 서지수가 어디 근본도 없는 어중이떠중이 집안 출신처럼 보일 수 있는데, 서지수는 당시 [[조선]]의 명문가인 [[달성 서씨]]의 후손으로서 할아버지 서종태, 아버지 서명균이 각기 영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한 유서 깊은 엘리트 가문 출신이다. 또한 어머니 [[청풍 김씨]]는 [[김구(동명이인)#s-3.2.2|김구]]의 딸로, 김구 역시 우의정을 지내고 그녀의 형제 김재로는 훗날 영의정을 지낸 영조의 총신이었다. 서지수 역시 말년에 영의정을 역임한 바 있다. 막말로 [[숙빈 최씨|무수리 출신 후궁]] 태생인 영조가 저렇게 출신 운운하며 함부로 깔볼 수 있는 허름한 가문이 절대 아니었다. 이러한 서지수에 대한 비하 발언의 배경에는, 영조가 냉대했던 [[정성왕후]]와 같은 [[달성 서씨]] 집안이라는 점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성왕후의 조카로 서지수와 같은 항렬인 서덕수 때문에 과거 영조가 곤경에 처한 일이 있는데, [[경종(조선)|경종]]을 죽이고 영조를 옹립하려는 [[삼수의 옥]]에 서덕수가 연루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영조는 경종 앞에서 폐세제를 자처하며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영조의 첫사랑인 [[정빈 이씨]]에게 독을 먹인 사람이 서덕수라는 이야기도 있다. 한 번 싫어하면 끝을 보는 영조의 성격상, 저 정도면 평생 극혐했을 수밖에. 설상가상으로 이때 돌던 [[홍역]]으로 사도세자의 바로 위 동복누나인 [[화협옹주]]가 그로부터 약 열흘 전 20세에 [[요절]]했다. 화협옹주도 사도세자처럼 아버지에게 미움받는 처지라, 둘은 만나면 "우리 남매는 아버님 귀 씻을 물이다."라고 웃으며 말하곤 했다. [[영조]]는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들으면 귀를 꼭 씻었는데, 귀 씻은 물을 사도세자나 화협옹주의 처소 쪽 방향에다 버리게 해 자식들을 대놓고 엿먹이곤 했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아빠한테 우리 남매는 스트레스 풀기 좋은 샌드백이지."라는 말. 나중에는 사도세자에게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고 "먹었습니다"라고 대답이 돌아오면 세자를 보면서 귀를 씻어버렸다고 한다. 세자를 무슨 '미리 접하고 씻어서 액땜해야 할 불길하고 더러운 것'마냥 취급한 것이다. 화협옹주는 바라던 아들이 아니라 또 딸이라고 영조에게 푸대접받는 처지라서 사도세자가 유독 애달파하며 챙겼던 누나인데, 이 [[화협옹주]]가 죽은 지 2주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영조는 선위를 하겠다고 한다. 사도세자는 각별했던 누나를 잃고 홍역에서 나은 직후의 성치 않은 몸으로, 1752년 12월 8일부터 19일까지 장장 열흘 가까이 다시 한 번 눈밭에서 석고대죄를 해야 했다. 게다가 이 기간 동안 영조는 세자를 불러 "내 시를 읽을 테니, 네가 울면 효성이 있는 걸로 알아 전교(殿敎)를 거두겠다."고 하여 세자로 하여금 울게 하였고, 세자가 충실하게 시행했으나 명령을 거두기는커녕 세자에게 "들어가지 않고 여기서 무얼 하고 있냐!"고 되려 화를 내고 전교는 안 거두고 있었다. 석고대죄가 [[소극적]]이면 그걸로도 화를 내서, 세자는 '''열흘 동안 아픈 머리를 바닥에 쾅쾅 찧으면서 피를 내야 했고''', 결국 이 추태를 보다 못한 '''대비가''' 나서서 제재하자 드디어 전교를 거둔다. 이런 현상이 나날이 심해지던 와중, 사도세자를 귀여워해 주던 할머니 [[인원왕후]] 김씨와 [[적모]](嫡母) [[정성왕후]] 서씨가 짧은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나마 브레이크였던 이들마저 떠나버린 뒤, 사도세자는 견디다 못해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세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1752년 궐을 출입하던 역술인 김명기를 통해 [[도교]]의 주문인 [[옥추경]](玉樞經)을 받아서 읽기 시작했다는데, 그해 겨울쯤부터 옥추경에 등장하는 신인 뇌성보화천존(雷聲普化天尊)의 [[환각]]이 보이기 시작해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이후 환각을 동반한 세자의 정신이상 증세는 점점 심해져, 나중에는 자신을 모시던 [[궁녀]]를 잔혹하게 죽이고 궁궐에서 도망쳐 [[평양]]까지 비밀리에 놀러가는 등, 갖가지 기행을 벌이기 시작했다.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되어 약방 도제조 이천보는 "세자는 사람의 발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뛰고 거의 죽으려 한다."라는 보고를 올리고,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마저 "세자가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한탄할 지경이었다. 사도세자가 부족하여 [[영조]]가 엄하게 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어린 사도세자의 기록들을 보면 전혀 아니며 세자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다. 영조의 질문에도 조리있게 대답하여, [[대리청정]] 이전에는 영조가 칭찬도 종종 했다. 질책 1번이 칭찬을 10번은 더 들어야 그러려니 할 정도로 혹독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칭찬하던 와중에 갑자기 급발진하지를 않나, 언제 어느 문제로 트집을 잡아 화내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위에서 보았듯 대리청정이 시작된 이후로 영조가 세자를 지나칠 정도로 엄하게 대했다. 다음은 단순 선위 파동을 빼고도 세자가 영조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를 알 수 있는 사건들이다. 참고로 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세자를 친손자처럼 아끼고 귀여워해준 적조모 [[인원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도 엄청 학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신하들조차 보다못해서 "세자 저하를 좀 그만 혼내시라", "왜 가만 있는 세자 저하를 저렇게 잡으세요!", "저하께서 대답을 못하시는것은 전하를 너무 두려워하기 때문이옵니다"라는 등의 충언을 올리다가 영조와 말싸움이 붙기도 했다. 1755년 11월 세자의 생모인 선희궁 [[영빈 이씨]]가 병이 들어 앓아누웠다. 이에 세자가 마땅히 선희궁이 기거하던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으로 병문안을 갔는데, 그곳에는 동복 여동생인 [[화완옹주]]도 있었다. 사도세자와 화완옹주 모두 선희궁 소생이니 문안 오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예뻐하는 딸의 곁에 싫어하는 아들이 가까이 간 것을 본 영조가 '''폭발했다.''' 영조는 '''"당장 나가라!"''' 라고 호통을 치며 길길이 날뛰었고, 친동생과 같이 있었다는 이유로 날벼락을 맞은 사도세자는 '''창문과 담벼락을 넘어 허겁지겁 자신의 처소로 달아났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동궁을 나와 청휘문[* 왕의 처소인 대전과 세자의 처소 동궁을 연결하는 문. 이곳에 오지 말라는 건 '''"네 문안 인사 안 받을 거고 꼴도 보기 싫다!"라는 것과 동의어였다.'''] 안에 들어올 생각도 말라"고 꾸짖은 다음에 "[[상서|서경]]의 태갑편이나 읽으라"[* 방자한 행실 탓에 쫓겨났다가 근신하고 겨우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왕자를 다룬 이야기. 그니까 누이동생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부왕은 그걸 방자하다고 확대해석하고 혼을 낸 것이다.]고 명령하며 세자궁을 나갔고, 이에 세자도 마침내 폭발했다. 세자는 "아무 잘못 없이 이런 일을 당하니 서러워서 약을 먹고 자결하겠노라"고 하며 크게 울부짖다가 주변인들이 달래서 겨우 진정했다. 1756년 5월 1일, [[영조]]가 세자가 기거하던 [[창경궁 낙선당|낙선당]]에 갑자기 들이닥쳐 [[술]]을 마시지 않은 사도세자에게 "술을 마신 것을 자백하라"고 닦달하며 몰아세웠다. 자다가 아버지가 불시에 온 것을 보고 헐레벌떡 일어난 세자의 몰골이 말이 아닌 것을 보고, 일방적으로 술에 취했다고 단정지은 것이다. 그 즈음 사도세자는 동궁에서조차 안절부절못하며, 취선당의 음식을 만드는 밧소주방에 자주 있었다. 깊고 고요하여 마음에 든다는 이유였다. 매섭게 몰아붙이는 아버지를 견디다 못한 사도세자는 "밧소주방 큰나인 희정이에게 얻어먹었습니다."라고 '''__거짓__ 자백을 '''했고, 이에 보다못한 사도세자의 보모인 최 상궁이 "술 잡숫는다는 말씀은 지극 원통하오니, 술내가 나는가 맡아 보소서."라고 '''영조에게 항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사도세자는 그래도 부왕이라고 아버지가 상궁에게 민망한 꼴을 당하자 "먹고 아니 먹고 간에 내 먹었노라 아뢰었으면 자네 감히 말을 할까 싶은가. 물러가소."라며 최 상궁을 물리쳤다. 그러자 영조는 "너, 내 앞에서 상궁을 꾸짖으니, 어른 앞에서는 견마도 꾸짖지 못하는데 그리 하는가."라고 사도세자를 꾸짖으며 춘방의 신하들을 시켜 '''사도세자를 '훈계'하라고 지시했다.''' 사도세자는 춘방의 신하들을 보고 원통함이 폭발하여 "너희 놈들이 내가 이렇게 억울한 말을 들어도 한마디 아뢰지 않고 나를 모시느냐. 모두 나가라. 어서 나가라."며 춘방 신하들을 쫓아냈는데, 신하들이 쫓겨나는 중에 실로 억세게 운 나쁜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촛대가 쓰러져 낙선당에 불이 난 것이다.''' 심지어 그 불길이 근처의 관의합에 있던 [[정조(조선)|세손]]의 거처로 향해서, 무거운 몸[* 당시 [[혜경궁 홍씨]]는 [[청선공주|청선군주]]를 회임 중이었으며, [[임신]] 6개월이었다.]으로 도망치던 [[혜경궁 홍씨]] 일행은 구조도 못하여 난리를 치는데, 다행히 불길이 방향을 틀어 세손은 무사했다. 영조는 이를 보고는 세자가 일부러 불을 지른 것이라 여겨, 모든 신하를 모으고 그들 앞에서 세자를 불러 세워 호통치며 "네가 불한당이냐? 이제 [[방화]]까지 하게!"라고 크게 꾸짖었다. 하도 무섭게 화를 내니 세자는 무서워서 "촛대가 쓰러져서 불이 난 것입니다"라는 해명도 못하고 그 시간을 견뎌야 했다.[* 영화 [[사도(영화)|사도]]에서는 이 일화를 각색한 장면이 나온다. 할머니 [[인원왕후]]가 죽은 이후 아버지 [[영조]]의 학대에 정신이 피폐해진 세자가 공부고 [[대리청정]]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정말로 술을 마신 상태였고, 이를 보고 분노한 영조는 귀 씻은 물을 세자에게 끼얹으며 폭언을 퍼붓고 자리를 박치고 나간다. 세자는 세자대로 영조가 내동댕이친 사발로 주변의 신하들을 내리치면서 "일개 상궁도 목숨걸고 나서는데, 내 편을 들어 주는 건 어떻게 한 놈도 없냐"며 화풀이를 하는 것으로 나온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서 세자의 [[후궁]] 이름은 [[박빙애]](朴氷愛)로, [[숙종(조선)|숙종]]의 3번째 왕비인 [[인원왕후]]의 침방 [[궁녀]]였다고 한다. 사도세자는 의붓할머니의 궁녀인 빙애를 좋아하여 취했으나, 영조는 "웃전의 나인을 취하는 건 옳지 않다"며 반대했다. 그러다 인원왕후가 승하하자, 사도세자는 아예 1757년(영조 33년) 9월 빙애를 후궁으로 삼았다. 그러나 국상 중에 이런 일을 쳤으니 [[영조]]가 세자를 불러내서 심하게 꾸짖고 "빙애를 데려오라"고 명하였다. 이에 사도세자는 빙애를 [[화완옹주]]의 집에 숨겨두고 다른 궁녀를 '가짜 빙애'로 만들어 속였다. 영조가 이 사실을 알고는 크게 화를 내며 빙애를 다시 내치려 하자, 사도세자는 양정합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 소동까지 벌였다. 또한 영조는 사도세자의 '''[[생일]]인''' 매년 음력 [[1월 21일]]마다 '''신하들을 모아놓고 그 앞에 세자를 세워 놓으며 잘잘못을 따졌다.''' --영조식 [[생일빵]]-- 아들의 생일을 축하해주기는커녕 아랫사람인 신하들 앞에서 질책만 하고 생일을 예사로이 넘기질 못하고 밥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며 욕을 들으니, 세자는 생일날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특히 사망 2년 전 생일에는 세자도 서러움이 폭발하여 아버지 영조에게 욕을 하며 화내고, "살아 뭣하겠냐"며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의 자녀들인 세손과 군주[* 세자의 적녀]들이 문안을 와도 "부모도 모르는 것이 자식이라고 알겠냐, 나가라"라며 불호령을 쳐서 아이들이 놀라 어쩔 줄 몰랐다. 1758년 7월 8일 [[영조실록]]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세자를 대하는 영조의 태도가 너무 가혹하다 여긴 도승지 남태회가 찾아와 울면서 고한다. >임금이 양지당(養志堂)에 나아가니, 도승지 남태회(南泰會)가 울면서 말하기를, > >"전하께서 동궁(東宮)에게 항상 엄격한 위엄을 가지고 주로 대하셨기 때문에, 저하(邸下)가 지나치게 스스로 두려워하고 조심합니다. 어젯밤의 일을[* 세자가 예식(禮式)을 행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영조가 세자의 몸이 좋지 않아 보인다며 예식을 취소했다.] 가지고 말씀드리더라도, 저하께서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조심하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 >"경의 말이 지나치다. 이 말은 박홍준(朴弘儁)과 가깝다." > >하였다. 남태회가 울면서 말하기를, > >"신이 춘방의 말을 들으니, ‘동궁께서 전하가 진전(眞殿)으로 오신다는 것을 알고서 밤이 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동궁의 예후(睿候)가 미령(未寧)한 가운데 이와 같이 초조하고 심려한다면, 어찌 민망하고 절박하지 아니하겠습니까?" >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 >"동궁(東宮)이 어찌 이를 알았다는 것인가?" > >하였다. 남태회가 말하기를, > >"동궁이 청대(請對)하였기 때문에 이를 알았던 것입니다." >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 >"춘방의 청대(請對)는 지나치다." > >하였다. > >―[[영조실록]] 92권, 영조 34년 7월 8일 임진 2번째 기사 세자는 아버지가 자신을 보러 온다는 말만 들어도 불안하고 무서워서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영조실록]]에는 이와 같이 신하들조차 영조에게 "전하께서 저하를 지나치게 엄하게 대하시니, 조금만 관용을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모습이 조선왕조에서 훈구ㆍ사림과 함께 가장 많은 의견 충돌을 한 [[노론]]과 [[소론]], 이 둘 외에도 '''당파를 불문하고''' 정말, 몹시, 자주 나온다. 심지어 위의 기사조차, 신하가 울면서 간하고 있는데도 영조의 반응은 그 신하에게 화를 내며 트집잡으려 하였다. 1759년에는 밝은 [[혜성]]이 나타났는데[* 사실 [[핼리 혜성]]이 76년 만에 [[태양계]] 안쪽으로 되돌아온 것이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혜성이 [[태양]] 주위를 도는 천체임을 몰랐다.], "이와 같은 천체의 재앙을 막기 위해서는 세자가 몸을 돌이켜 수성(羞誠)해야 한다"는 취지의 상소가 올라왔다. 이에 세자는 따르겠다고 했으나, 계속되는 돌발 행동으로 영조의 불신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렇게 일국의 세자가 창문을 넘어 달아나고 [[자살]] 소동만 서너 번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세자는 부왕이 잘해주지도 않으면서 걸핏하면 화를 내고 질책을 계속하며, 선위 파동이니 뭐니 해서 머리가 피가 나도록 두드려대면서 [[석고대죄]] 쇼를 해야 했고, 심적 부담으로 기절까지 하니, 나중에는 제정신이 유지가 안 될 정도였다. 게다가 냉혹한 부왕은 세자의 대접까지 날이 갈수록 박하게 했는데, 1760년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행궁]]으로 세자가 거동할 때는 호위 병력이 고작 500명에 --에게??--지나지 않았고[* [[조선]]시대에 국왕의 행차 때는 호위로 4천 명 이상의 병력이 동원된다. 물론 세자가 차기 왕이긴 해도 엄연히 신하의 입장이니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빈약했던 것이라곤 추측이 가능하다.] 세자의 사부와 빈객들이 하나도 따르지 않아서, 한양의 식자들이 이를 보고는 "일국의 세자의 행차가 고작 이 정도냐?!"라고 한탄했다는 기록을 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덕일은 "호위 병력이 500명이나 되었으니 세자가 대접을 잘 받은 것 아니냐"고 주장하지만, '''왕족도 아니라 당시의 '__한낱__ [[양반]]'에 지나지 않는 권세 있는 양반들까지도 __왕족__한테''' '''"저게 뭐냐"'''고 한탄하는 꼴을 보면 명백한 푸대접이다. 마찬가지로 1760년 여름에 [[가뭄]]이 심했는데, 영조는 "이것 역시 모두 다 세자 때문"이라며 '차마 듣지 못할 전교'[* '차마 듣지 못할 전교'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왕의 욕설을 돌려 적는 표현이다. 이런 표현을 쓰지 않고 사관이 생으로 써버린 경우가 딱 한 번 있었는데, [[인조]]의 '''개새끼''' 발언이다. 즉, 영조는 아들한테 쌍욕 바로 밑의 극언을 퍼부었다는 것이다.]를 퍼부으니 세자가 견디지 못했다고 한다.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자신의 며느리인 [[효의왕후]]가 간택되어 세손빈으로 입궁할 때 조차도 참석하지 못했다. 삼간택 중 2번째 간택 과정에선 효의왕후와 정조가 [[천연두]]에 걸려서 온 왕실은 물론이고 사도세자도 이를 걱정하며 밤을 샐 정도였다. 그런데도 영조는 사도세자가 간택에 참석하는 걸 막았다. 마지막 삼간택 때는 차마 막을 수 없어서 사도세자도 참석이 가능했는데, 이 때 사도세자는 아래에 언급할 의대증 때문에 망건에 달 관자도 제대로 찾지 못했다. 이 때문에 세자 직위에 어울리지 않는, 정3품 관료가 착용하는 통정옥관자를 착용했다. 이를 본 영조는 이를 꼬투리 잡아서 간택 자리에서 쫒아냈다. 이를 보다 못한 [[혜경궁 홍씨]]는 [[정순왕후 김씨(조선)|정순왕후 김씨]], [[영빈 이씨]], [[화완옹주]]와 의논해서 [[효의왕후]]가 간택 후 세손궁으로 가기 전 잠깐이라도 동궁에 들러서 사도세자와 만나게 했다. 영조에게 쫓겨나서 앓아 누워 있던 사도세자는, 효의왕후를 매우 반갑게 맞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