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도세자 (문단 편집) == 이름과 시호 == 휘는 '훤(愃)'으로, '너그럽다'는 뜻이다.[* 작은아버지 [[연령군]]의 이름과 발음이 같지만 [[한자]]는 다르다. 연령군의 이름은 '밝을 훤(昍)'이다.] '선'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愃'에 '선'이란 음도 있기 때문이다.[* '선'으로 읽을 때는 글자 뜻도 '잊다'로 바뀐다.] 그런데 [[https://jsg.aks.ac.kr/dir/view?dataId=JSG_K2-356|고종 때 지은 《열성어휘(列聖御諱)》에는 독음이 '훤'으로 적혀있고, 대응하는 음의 한자로 '煊(마를 훤)'을 써두었다.]] 또한 자(字)가 너그럽다는 뜻인 '윤관(允寬)'인데, 이름과 자는 뜻이 연관되게 짓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사도세자의 이름 역시 '잊는다'는 뜻인 '선'보단 '너그럽다'는 뜻인 '훤'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하다. [* 張裕昇, 2021, 〈조선 왕실의 작명 연구〉, 《東方漢文學》 86집, 동방한문학회.] 원래 [[영조]]가 내린 시호는 '사도(思悼)' 단 2글자였다. 그러나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장헌(莊獻)'을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003020_001|존호로 올려]] '사도장헌세자'가 되었고, 정조 7년([[1783년|1783]])에는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703008_007|존호가 추가]]되어 '사도수덕돈경장헌세자'가 되었으며, 정조 8년([[1847년|1784]])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809018_003|'홍인경지(弘仁景祉)']], 다시 정조 18년(1794)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812018_004|'장륜융범기명창휴(章倫隆範基命彰休)']]를 올렸고, 한참 뒤인 [[철종(조선)|철종]][* 사도세자의 [[은언군|서출]] 증손자] 5년([[1854년|1854]]) [[http://sillok.history.go.kr/id/kya_10511006_001|'찬원헌성계상현희(贊元憲誠啓祥顯熙)']]를 더함으로써 최종적인 정식 시호가 '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륜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장헌세자'로 길어졌다. 간혹 "장헌세자가 죽어서 '사도세자'라는 칭호를 얻었다"라는 말이 돌곤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둘 다 죽은 뒤에 붙은 시호인데다 '사도(思悼)'는 [[영조]], '장헌(莊獻)'은 [[정조(조선)|정조]]가 붙인 시호라 오히려 장헌이 나중에 붙었다. 어차피 장헌세자가 되고 나서도 사도도 여전히 시호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두 칭호를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세자로 있는 동안, 공식 칭호는 '세자' 단 두 글자이기 때문.[* 어차피 세자는 동시에 여러 명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냥 세자라고만 불러도 헷갈릴 일이 없다. 양녕대군 역시 폐세자 되어 대군이 된 뒤 동생들처럼 '녕'자를 돌림자처럼 쓰고 사양할 양(讓)을 붙인 것으로, 세자였던 때는 단순히 세자로만 불렸다.] 영어권에서는 Prince Sado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