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기(역사책) (문단 편집) === 〈본기〉(本紀) === 중화 세계를 지배한 통일국가와 천자에 대한 기록이다. 항우와 여태후가 〈본기〉에 들어 있는 것이 특이점이다. 명분과 신분보다 그 인물이 끼친 영향력과 업적을 중시한 사마천이기에 위의 두 인물이 편입될 수 있었다. * 〈삼황본기(三皇本紀)〉: [[삼황오제#s-1]] 중 '3황'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동이족 태호 복희로 시작하는 삼황을 허구로 단정하여, 삼황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기 때문에 사마천이 쓴 정식 12본기는 아니며, [[당(통일왕조)|당나라]] 때 사마정이 《보사기》(補史記)를 쓰면서 추가한 것이다.[* 국내에서 시판 중인 완역본 《사기》 중에서 〈삼황본기〉를 실은 번역본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번역본뿐이다. 일부 편역본에서 〈삼황본기〉를 수록한 정도이다.] 천황, 지황, 태황(인황), 그 외에 [[복희(중국 신화)|복희]], [[여와]], [[신농]], [[축융]], [[황제(중국 신화)|황제]] 등이 3황으로 꼽힌다. * 〈오제본기(五帝本紀)〉: 삼황오제 중 '5제'에 대한 기록으로, 사마천이 쓴 정식 12본기 중 첫 번째 기록이다. 오제가 누구인지는 여러 설이 있지만 이 〈본기〉에서의 오제는 [[황제(중국 신화)|황제]], [[전욱]], [[제곡]], [[요(삼황오제)|요]], [[순(삼황오제)|순]]이다. 다만 현재의 〈오제본기〉는 사마천 당대의 것이 아니라 당나라때 그 이전에 소실되어 버린 해당 부분을 재판한 것이다. 후대의 주석에서는 [[소호|소호(금천)]]를 5제에 넣기도 한다. * 〈[[하나라#s-1|하]]본기(夏本紀)〉: 선조인 [[황제(중국 신화)|황제]]부터 곤(鯀)까지의 가계 및 1대 [[우(하나라)|우왕]]에서 17대 걸왕까지의 역사를 기록했다. 대부분 《[[상서|서경]]》(書經)의 〈하서〉를 배낀 것이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서경》의 각 편이 어떤 이유로 편찬되었는지도 기록되어 있다. * 〈[[상나라|은]]본기(殷本紀)〉: 시조 설(契)이 성씨를 하사받은 일로부터 시작하여, 1대 탕왕에서 30대 [[제신|주왕]]까지의 역사를 기록했다. 이 또한 《서경》의 〈상서〉를 베낀 것이다. 역시 각 편의 편찬 이유도 기록했다. * 〈[[주나라#s-1|주]]본기(周本紀)〉: 시조인 [[후직]] 이후의 가계 및 [[고공단보]]의 건국, 1대 [[무왕(주)|무왕]]에서 37대 난왕까지의 역사를 기록. * 〈[[진(통일왕조)|진]]본기(秦本紀)〉: 선조인 [[전욱]]부터 이어지는 가계 및 1대 양공에서 30대 [[장양왕]]까지의 진의 역사를 기록. 진시황 이후는 〈진시황본기〉로 따로 편찬했다. *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진(통일왕조)|진]]이 중국을 통일한 시기의 역사로, 시황제, 2세황제, 진의 멸망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 〈[[항우]]본기(項羽本紀)〉: [[패왕]]으로 불렸던 항우의 일대기. 황제가 되지 못한 항우를 황제처럼 〈본기〉에 넣었다. 《사기》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 〈[[한고제|고조]]본기(高祖本紀)〉: 한고조 유방의 일대기. 유방이 거병하기 전 시절부터 중국을 재통일하고 붕어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 〈[[여후|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고조 유방 사후 즉위한 [[혜제(전한)|혜제]], [[전소제(전한)|두 명의]] [[후소제(전한)|소제]] 시대에 실권을 장악한 여태후의 일대기. 정식 황제가 아닌 실권자를 〈본기〉에 기록한 특수한 기록이다. * 〈[[한문제|효문]]본기(孝文本紀)〉: 여태후 사후 즉위한 효문제 유항의 일대기. 유항의 대왕(代王)시절부터를 기록하고 있다. * 〈[[한경제|효경]]본기(孝景本紀)〉: 문제의 뒤를 이은 효경제 유계의 일대기. 원본이 소실되었기[* 《서경잡기》(西京雜記)의 기록에 의하면 사마천이 〈경제본기〉에 [[한경제|경제]]와 [[한무제|무제]]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담자 무제가 잔뜩 화가 나 그 내용을 지워 버렸다는 설이 있다.]에 후대의 어느 인물이 간략하게 보충한 것이 전해온다.[* 후대에 《[[한서]]》 〈[[경제(전한)|경제]]기〉를 참고하여 소략하게 작성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 〈[[한무제|효무]]본기(孝武本紀)〉: 경제의 뒤를 이은 효무제 유철의 일대기. 《사기》 〈태사공자서〉의 해제에는 〈금상[* '''금상'''(今上)은 현재 왕위나 황위에 앉아 있는 임금을 이르는 말이다. 아직 군주제가 남아있는 [[일본]]에서는 오늘날에도 [[나루히토]]를 금상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본기(今上本紀)〉라고 되어 있다. '효무'는 무제가 죽은 뒤에 붙여진 [[시호#s-1]]이고, 사마천은 한무제 시절에 《사기》를 완성했으니 〈금상본기〉라고 칭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인데, 이렇게 된 것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사마천이 직접 만든 〈금상본기〉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가필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일부러 이렇게 제작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현전하는 《사기》의 〈효무본기〉는 저소손[* [[원제(전한)|원제]]와 [[선제(전한)|선제]]대의 인물로, 현존하는 《사기》에는 이런 식으로 저소손이 보충한 곳이 상당히 많다.]이 〈봉선서〉 일부에서 내용을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효무본기〉의 내용이 봉선 의식과 관련된 내용으로 가득찬 이유가 무제의 경우, 수십 년 제위에 있으면서 한 것이라고는 사치스럽게 제사를 지낸 것밖에 없다는 사마천의 비판적인 시각을 반영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