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교육 (문단 편집) === [[1960년대]] ~ [[2010년대]] === 1960년대 서울에서는 명문 '''중학교''' 진학을 위해서 사교육이 극성이었다. 고등학교 교사들의 고액 불법 과외가 사회 문제가 되자, 1969년 중학교 평준화 정책을 실시하여 중학교 입시 전쟁이 막을 내렸다. 하지만 대신 명문 '''고교'''에 입학하기 위한 입시 전쟁이 더욱 치열해졌고, 1974년 고교 평준화가 실시되면서 고교 입시 전쟁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대학교''' 입시가 문제가 되었다. 60 ~ 70년대 서울 도심을 중심으로 중고교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입시 학원들이 크게 성행하기는 했다. 하지만 서울 종로, 광화문 주변의 몇몇 명문 학교 학생들에 국한된 현상에 가까웠고, 서울 4대문 밖을 벗어나면 입시 학원이 흔하지 않았다. 지방에서는 아예 학원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종로, 광화문에 있던 몇몇 명문 학교 학생들을 제외하면 현역 중고등학생이 방과 후에 학원을 다니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영어, 수학 등 중요한데 뒤떨어지는 한두 과목 공부를 보충하려고 방과후 가는 경우는 종종 있었으나, 수강료가 비쌌고 시험 문제가 '''교과서 외'''에서 출제되지도, '''선행 학습을 전제로''' 출제되는 일도 없었기 때문에 흔하지는 않았다. 또 많은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70년대 국민소득이 늘어나면서 처음에 종로 2가와 광화문에서만 찾아볼 수 있던 입시 학원이 성북구 등 서울 외곽으로도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사교육은 풍선 효과를 보이며 계속 커져만 갔다. 게다가 요즘처럼 인강도 없었고, 오로지 서울 종로 학원가에서 현강만이 존재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지방 학생들이 이런 사교육을 접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며 사교육의 지역 격차가 커져갔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1980년 7.30 조치가 내려지면서 과외 및 초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모든 학원이 금지되었다. 음악, 미술, 태권도 등 예체능 학원만 운영이 가능했고, 국영수사과 등 입시 과목에 해당하는 모든 교과목은 학원 교습 및 과외 교습이 일체 불허되었다. 때문에 80년대 사교육 시장은 한동안 급속히 위축되는 양상을 보였다. 다만 재수생 학원은 허용되었는데, 재수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성인이기 때문에 규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대에도 부유층의 경우에는 몰래 과외를 하는 경우는 많았다. 어쨌거나 입시학원이 불허된 80년대에는 국민소득 향상과 함께 음악, 미술, 태권도 학원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여 각 주택가에 이러한 예체능 학원들이 흔하게 생겨났다. 아울러 '''속셈학원'''과 '''주산학원'''이 이 학생들의 계산 능력을 키워준다는 믿음과 함께 크게 성장했던 시기였다. 또 속셈학원과 주산학원은 직접적인 입시 과목이 아니었기에 허용되었다. 그리고 80년대 후반에는 당시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퍼스널 컴퓨터의 발달과 함께 컴퓨터 학원이 인기를 얻어가기 시작했다. 또 재수학원과 더불어 검정고시 학원도 허용되었는데, 이는 검정고시 응시자들이 학교를 다니지 않기 때문에 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빚쟁이를 피하기 위해 학교를 다니지 못하다가 검정고시에 도전하는 경우도 많았기에 [[전라도]] 출신들이 많은 서울 부도심이나 인천 등에서 대형 검정고시 학원들이 급성장해 큰 성공을 거두며 사교육 재벌로 거듭나기도 했다.[* 당시 서울 동대문에서 [[호남향우회]] 출신 자녀들을 대상으로 검정고시 학원을 해서 큰 성공을 거두어 사교육 재벌이 된 사례로 [[문상주]]가 있다. 당시 그는 고졸에 별다른 학벌이 없었지만 검정고시 학생들이 대부분 일자무식 상태였기 때문에 검정고시 강사 및 원장으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동대문에서는 지역 유지 행세를 했고, 90년대 이후 시대가 변해 검정고시 학원이 몰락하고 입시 학원이 흥할 때에도 적절하게 잘 대처하여 한샘학원, 제일학원, 고려학원 등 대형 재수학원, 단과학원을 다수 인수, 성장시켰으며, 심지어 인강 회사 비타에듀를 설립, 이 역시 2000년초부터 약 10년간 메가스터디에 이은 2위권 인강업체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기에 존재했던 특이한 사교육으로 [[카세트 테이프]]를 이용한 사교육이 있었다. 강사가 강의를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해, 인쇄된 교재와 함께 세트로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밑줄 쫙”으로 유명했던 [[서한샘]]의 국어 카세트 강의는 오늘날에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80년대 후반 민주화가 된 후 [[노태우 정부]] 때 각종 규제를 풀면서 과외 및 중고교생들을 대상으로 한 입시 학원도 다시 허용되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해서 사교육 시장은 급속한 팽창을 거듭해왔다. 90년대 들어서는 우리나라도 선진국 문턱에 들어설 정도로 국민소득이 증가했고, 이에 부모들은 자식의 교육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으며, 이와 함께 사교육도 계속 성장했다. 게다가 한국 '''학'''부모 특유의 경쟁 심리와 이기심, 정부의 무대책 교육 정책들의 시너지를 이루며 사교육 열풍을 더욱 부채질했다. 90년대 초중반부터 지금까지 사교육 문제는 교육 문제의 단골 메뉴였고, 교육 문제 해결 공약 1순위였다.[* 심지어 97년에 IMF가 온 것도 과도한 사교육을 지목한 경우[* 물론 이건 국민들의 과소비 탓으로만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올바른 문제 대책은 아니다.]도 있다.] 이후의 정부에서 EBS를 활용하는 식으로 사교육을 억제하려는 정책을 펴왔지만 근본적인 사회 구조를 바꿔야 하기에 실패를 반복할 뿐이었고, 2000년대 이후로 극심해진 저출산 현상의 한 원인으로 지목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억제했음에도 그토록 지속적으로 팽창했던 사교육 시장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도 저출산 때문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2010년대 후반 들어서는 대입 시장의 지나친 경쟁 격화와 학생 수의 감소 때문에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사교육이 확대됐다. 전통적으로 시장이 컸던 [[공무원]]을 비롯한 각종 시험 대비만을 위한 학원뿐만 아니라, 대학 [[공학]] [[인강]], [[코딩]] 강의, [[디자인]] 강의 등 온갖 분야로 사교육의 영역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