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벨기에/역사 (문단 편집) == 부르고뉴령 네덜란드~프랑스 지배기 == [include(틀:관련 문서, top1=저지대 국가)] || [[파일:부르고뉴령 네덜란드(1477).png|width=400]]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00px-Spanish_Netherlands.svg.png|width=400]] || || 부르고뉴령 네덜란드(1477) || [[스페인령 네덜란드]](1560) || || [[파일: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지도(1789)_nl 2000px.png|width=400]] || [[파일:Map_administrative_divisions_of_the_First_French_Empire_1812-en.svg.png|width=400]] || ||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1789) || [[프랑스 제1제국]](1812) || [[15세기]] 초 이 지역에 위치했던 [[플란데런 백국]], [[브라반트 공국]], [[에노 백국]] 등을 [[부르고뉴국|부르고뉴 공작]][* 이 무렵에 [[잔 다르크]]를 붙잡아 팔아넘긴 걸로 알려진 귀족이 바로 이 부르고뉴 공국을 따르는 [[룩셈부르크 가문|룩셈부르크 백작]]이다. 사실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 왕실의 혈통이 있긴 하지만 영토 문제와 정치적인 문제 등으로 프랑스 왕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거의 독립국이나 마찬가지였고 이름만 부르고뉴였지 공작은 부르고뉴 등 프랑스내 영토보다는 플란데런 등 [[저지대 국가|저지대]] 지방에 머무는 걸 좋아했다. 프랑스계 귀족이긴 하지만 잔 다르크를 붙잡아 팔아넘겼다고 그리 놀랄 일이 아닌 셈.]이 하나하나 반강제로 상속받으면서 북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네덜란드 지역이 [[부르고뉴국]]의 통치하로 들어갔다. 1477년 부르고뉴 공작이던 용담공 사를이 남자 계승자를 남기지 못하고 전사하자 부르고뉴와 저지대의 병합을 노리던 프랑스는 이를 계기로 부르고뉴를 침공하였고 이를 막기 위해 샤를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외동딸 [[마리 드 부르고뉴]] 여공작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면서 [[저지대 국가|저지대]]는 [[부르고뉴]]와 함께 [[합스부르크 네덜란드]]가 되어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마리와 막시밀리안의 아들인 [[펠리페 1세|미남왕 필리프]]는 유화적인 통치를 하여 대체로 주민들에게 지지를 얻었다.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는 막시밀리안 1세와 [[펠리페 1세|필리프]]를 거쳐 [[카를 5세]]가 물려받게 되었다. 이후 카를 5세는 네덜란드 북부까지 완전히 차지하여 베네룩스 저지대 지역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고, [[저지대 국가|저지대 지역]]을 17개 주로 개편한다. 카를 5세는 [[플란데런]]의 [[겐트]]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저지대를 고향으로 여겼고 어느정도 애착심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전쟁을 수행했던 카를 5세에 의해 점차 과중한 과세에 시달리게 되자 결국 플랑드르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어 카를 5세와의 관계가 크게 악화되었다. 게다가 네덜란드에 [[칼뱅파]] 개신교가 확산되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카를 5세는 만년에 네덜란드의 개신교도들을 크게 탄압했다. 1556년 [[카를 5세]]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스페인]], 남부 이탈리아와 함께 저지대 17개 주를 [[스페인령 네덜란드|물려주게 된다]]. 카를 5세 시절에는 그래도 스페인과 동등한 합스부르크 세습령 중 하나의 대우를 받았으나[* 일단 카를 5세 본인이 저지대를 고향으로 여겨 종종 네덜란드에서 거주하기도 했으며, [[마리 드 부르고뉴]]의 딸이자 카를 5세의 고모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가 카를 5세를 대리해서 네덜란드를 통치했기 때문에 네덜란드의 대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스페인에서 나고 자란 골수 가톨릭 신자 펠리페 2세는 스페인을 본국으로 여기고 네덜란드에는 총독을 파견하여 식민지처럼 강압적인 통치를 했다. 특히 저지대의 [[칼뱅파]] 개신교도들을 억압하려 들면서 합스부르크에 대한 반감이 커져갔다. 사실 펠리페 2세의 통치는 기본적으로 아버지 카를 5세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러나 카를 5세는 그렇게 인식했듯, 저지대 사람들은 카를 5세가 밉든 곱든 간에 어쨌든 그래도 고향 출신의 군주로 여겼지만, 펠리페 2세는 완전한 스페인 사람인 외국인으로 여겼기 때문에 반감이 훨씬 심했다. 사실 카를 5세에 대한 감정도 그의 만년의 가혹한 탄압으로 인해 반감으로 변해 버렸다. 결국 1568년 스페인의 폭정에 대항해 네덜란드어권의 [[네덜란드 공화국|북부 7개 주]][*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 겔러, [[프리슬란트]], [[오버레이설]], [[흐로닝언]].]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80년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남부 10개 주는 반란에 참여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저지대 북부가 개신교 다수 지역이여서 그렇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네덜란드의 개신교화는 독립 이후의 '결과'이지 독립의 '원인'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네덜란드는 가톨릭 다수 지역이었으며 저지대에서 개신교 다수 지역은 지금의 벨기에 북부인 플란데런 지방이었다. 이 부분은 [[네덜란드/역사]] 참조.] 그러나 [[1579년]] 같은 네덜란드어권의 플란데런[* 지금의 플란데런 지방의 오스트플란데런/베스트플란데런 주. 지금은 역사적 지역으로서의 플란데런을 포함한 네덜란드어권 5개 주를 가리키는 것으로 바뀌었다.], 안트베르펀, 브라반트의 3개 주가 추가로 반란에 동참해 기존에 반란을 일으킨 네덜란드어권의 7개 주와 함께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어권의 나머지 7개 주가 스페인에 협력하는 아라스 동맹을 결성하면서 또다시 분열되었다. 반란에 추가로 동참한 3개 주는 저지대 17개 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는데 [[플란데런]]과 [[안트베르펜]]은 부유한 저지대 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으므로 경제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16세기 당시 안트베르펀의 주도 [[안트베르펜]]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 수입은 아메리카 대륙의 광대한 식민지에서 올라오는 수입과 동일한 수치였다. 안트베르펀이란 도시 딱 하나만 해도 이 수치인데 플란데런과 안트베르펀 주 전체는 말할 필요도 없다.], 브라반트는 당시 스페인령 저지대 지역의 의 행정 중심지가 브라반트의 중심 도시 [[브뤼셀]]에 위치했던 탓에 정치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스페인에 잔류한 프랑스어권 7개 주와 인접해 있어서 공략이 가장 쉬웠기 때문에 이 3개 주는 스페인 진압군의 첫 번째 목표가 되었다. 스페인군 사령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의 활약으로 1585년 안트베르펀이 함락당하면서 결국 3개 주는 다시 굴복하였다. 이것으로 가톨릭의 남부 10개 주(벨기에)와 개신교의 북부 7개 주(네덜란드)가 결정적으로 나뉘게 되었다. 3개 주의 개신교도들은 가톨릭으로 개종을 강요받았으나 대부분 개종을 거부하고 북부 네덜란드로 이주하는 길을 택했다. 그 결과 3개주는 가톨릭 다수 지역이 되었으나 원래 거주하고 있던 칼뱅파 개신교도들이 대거 북부로 빠져나가면서 산업의 중심지가 북부 네덜란드로 이동하였으며 벨기에 지역은 인구가 급감하고 산업이 쇠퇴하고 말았다. 과거에는 벨기에 지역이 네덜란드 지역에 비해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지만 전쟁을 끝낸 1609년에는 벨기에 지역의 인구는 1,600,000명이고 네덜란드 지역의 인구는 1,500,000명으로 거의 차이가 나지 않게 되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북부 7개 주가 네덜란드로 독립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지만 남부 10개 주는 계속해서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714년에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스페인의 네덜란드를 [[오스트리아]]에 본거지를 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이 가져갔는데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령]]이 되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불리게 되었다. 벨기에 지역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에 저항했다. 1789년 [[프랑스 왕국]]에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에 호응하여 1790년에 [[벨기에 합중국]]을 세우게 된다. 비록 벨기에 합중국은 1년을 채 못 가고 다시 진압당하지만 벨기에라는 이름을 가진 첫 독립 국가로 벨기에의 국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나중에는 [[프랑스 혁명]]군에게 공격을 받아 프랑스의 영토가 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