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배정자 (문단 편집) === [[조선]]으로의 귀국, 그리고 첩자 활동 === 1894년 다야마 사다코(田山 貞子)로 개명한 이후 [[조선]]에 귀국하여 [[경복궁]]으로 입궐하고, [[일본어]] 통역자를 빙자하여 [[고종(대한제국)|고종]]과 밀접을 하게 된다. 그녀의 첩자 활동을 몰랐던 고종은 그녀의 매력에 빠지게 되는 바람에 총애를 하게 되었고, 궐 내에서 자주 만나는 행보를 보였다. 그러면서도 고종을 유혹하고 나서는 [[조선]]의 기밀 정보를 유출시키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등 첩자 역할을 하였다. 단순한 첩자라는 말부터 고종이 [[연해주]]로 망명하려는 걸 분쇄했다는 등등의 이야기도 있는데. 신빙성은 별로 없다. 1905년 [[이토 히로부미]]의 밀서를 [[고종(대한제국)|고종]]에게 전달한 밀서 사건으로 절영도에 유배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 해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훈령에 따라 석방되어 정계에 복귀하였다. 심지어는 [[덕수궁]]의 정문인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개명한 것도 安자가 家 아래에 女가 있어 궐문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배정자를 연상케 해서였다는 속설이 널리 퍼졌을 정도. 이와 같이 직접 조선의 조정에서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다녔음에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그 이름 한 줄 찾아볼 수 없으며, 절영도로 유배됐다는 설 역시 신빙성은 낮다.[* 구한말 절영도(현재의 부산 영도)는 일본인들이 멋대로 들어와 땅을 사서 창고나 상점, 집을 짓고 살 정도로 일본과의 왕래가 많은 지역이다. 그런 곳에 친일 성향의 배정자를 유배 보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905년 일본의 사진출판사 하쿠분칸(博文館)에서 출간한 『한국사진첩』에 사진이 실려 있다. 다음 [[https://dancepostkorea.com/new/board/column/recollection_view.php?b_idx=115&page=1&search_part=b_title&search_acv=|링크]]의 [사진 6] 참조. 사진 설명에는 “두 명의 귀부인 중 우측에 서 있는 사람이 한국 제 1등의 여류 교제가로 일컬어지는 현영운 씨의 부인이다”라고 쓰여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